구글 CEO인 에릭 슈미트가 24일 이라크를 극비리에 방문했다. 정부 고위 관리도 아니고 군수업체 임원도 아닌 글로벌 IT업체 CEO인 에릭 슈미트가 위험을 무릅쓰고 분쟁지역인 이라크에 갑작스럽게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이라크 방문 사실은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의 보도로 공식 확인됐다.
구글 CEO의 이라크 방문은 안전상의 문제로 극비리에 추진됐다. 그가 방문한 곳은 다소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라크 국립박물관이었다.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고대 앗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명 시대의 희귀한 유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03년 4월 미국의 사담 후세인 축출 과정에서 1만5000점의 유물이 약탈됐으나 5000점 정도는 회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총 26개의 갤러리 가운데 8개의 갤러리만 복원된 상태다. 대부분 유물은 비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동안 몇차례 공개했지만 저널리스트, 학자 등 극히 일부만 관람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의 접근은 사실상 힘들었다.
에릭 슈미트 일행의 이라크 국립박물관 방문은 군사 작전을 방불케했다. 소대 규모의 경호원들이 근거리에서 보호하고 헬리콥터가 공중을 선회했다. 박물관 인접 건물에는 저격수까지 배치되었다.
이런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면서 에릭 슈미트가 굳이 이라크 국립박물관을 방문한 이유는 이라크 박물관이 소장한 수많은 고대 유물을 디지털화 하기위해서다.
에릭 슈미트는 이라크 주재 크리스토퍼 힐 미국 대사, 아미라 에단 이라크 박물관 디렉터,이라크 정부 관료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행사를 갖고 이라크 국립박물관의 수많은 고대유물을 디지털화해 내년부터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서비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소장품을 디지털화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구글이 전부 부담키로 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대사는 “이라크에 첨단 IT기술을 가져오려는 이번 노력은 국무성 주도로 이뤄졌다”며 ”에릭 슈미트 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은 이번에 이라크 국립박물관 소장품 1만 4000여점을 디지털화해 내년 초 ‘가상 박물관’을 열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이라크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유물들이 고대 문명 연구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는 셈이다. 그동안 도서관 디지털화 작업 등을 추진해온 구글 입장에선 소중한 인류문화유산을 디지털화하는 명분을 얻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혹시 나중에 실속을 차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미 인터넷상에 ‘가상 이라크박물관’(http://www.virtualmuseumiraq.cnr.it)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구축된 가상 이라크박물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선사시대,수메르,앗시리아,바빌로니아,이슬람 등 시대별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미 가상 이라크박물관이 있는데 구글이 가상박물관을 또 만든다고...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현재 운영되고 있는 가상이라크박물관은 지난 2007년 이탈리아 정부가 1백만 유로를 지원해 구축한 것이라고 한다.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좀 어설프긴 하다.
박물관측 관계자는 `기존의 가상박물관은 이탈리아 정부 산하 국립리서치센터와 공동으로 추진한 것인데 만족스럽지 않다"며 "이번에 구글과 디지털화 사업을 추진하면 더 많은 고대 유물을 디지털화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 박물관구축사업에 경쟁이 도입되면 훨씬 나은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는 게 박물관측의 의도인 모양이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구글은 실제로 현장을 충분히 답사하고 유물을 실측해 온라인상에서도 실제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환경을 구현하게 될 것"이라며 구글의 박물관 구축 사업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무튼 인류의 공동 유산인 이라크 국립박물관의 디지털화 작업은 빨리 진행되어야만 하는 인류의 공통과제다. 최근에도 박물관 근처에서 폭발물이 터졌다고 한다. 전쟁의 발발로 인명이 손상되는 것 못지않게 인류의 문화재가 손상을 당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전자신문인터넷 장길수기자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