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는 뜻을 담은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자조적인 말로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었을 때’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진정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게임아카데미 출신으로 최근 미국 인섬니악게임스에 게임디자이너로 입사한 권순형씨가 좋은 본보기다.
권씨는 지난 2003년 스물 일곱 살 나이에 게임아카데미 4기 그래픽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오는 사람도 있는데다 대부분 20대 초반인 동기들과 달리 이미 대학까지 마친 권씨는 특이한 입학생이었다. 물론 동기 중 최고령자도 권씨 몫이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도 전자공학으로 게임 그래픽과는 거리가 멀었다.
권씨는 “나이도 가장 많은데다 대부분의 동기가 미술 전공자들이라 심리적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며 “하지만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에 대한 소신으로 더 노력해서 차이를 줄여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게임 개발 과정에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것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컴퓨터 관련 지식이 풍부해 각종 소프트웨어와 툴을 다루는 데 이해의 깊이와 속도가 남달랐다. 이 때문에 게임 제작 과정에서 프로그래머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훨씬 수월했다.
게임아카데미의 장학금 제도와 교수와의 긴밀한 네트워킹도 도움이 됐다. 교육비 부담 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고, 꾸준한 교수 면담을 거쳐 그래픽 작업자로서의 철학과 비전을 고민할 수 있었다.
권씨는 “그래픽 작업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점을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며 “게임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내가 왜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력과 열정은 최우수 졸업생이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권씨는 2006년 졸업과 동시에 엔씨소프트 아이온 팀의 배경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이후 게임아카데미와 공동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미국 카네기멜론대 엔터테인먼트테크놀로지센터(ETC)에 입학해 2008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과 함께 미국 게임사 ‘디바이드 바이 제로 게임스’에 동양인 최초로 입사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9월 인섬니악게임스에 입사했다.
인섬니악게임스는 ‘레지스탕스’ ‘라쳇 앤 크랭크’ 등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콘솔게임을 제작한 업체로 최근 3년간 미국에서 일하기 좋은 회사 베스트 10에 꼬박꼬박 오를 정도로 게임 종사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회사다. 입사 과정도 쉽지 않아 권씨도 3번의 인터뷰와 2번의 테스트를 거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권씨는 “게임 그래픽 디자인이란 단순히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과 교감할 수 있게 하는 도구”라며 “인섬니악게임스에서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