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학생이 ‘세컨드라이프’에서 만나 대화하고, 동남아 최초의 4차원(D) 극장인 ‘센토사 4D 매직스’가 있는 나라. 싱가포르는 싱가포르국립대(NUS)와 난양기술대(NTU)라는 세계일류공대 속에서 사회과학과 공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조화를 이루며 융합연구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싱가포르가 발전해온 것처럼 국적불문의 외국인 연구진이 모여 아시아의 문화와 기술을 토대로 뉴미디어 분야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양의 ‘MIT 미디어랩’을 꿈꾼다=NUS와 NTU는 2000년대 중반 각각 인터랙티브디지털미디어연구소(IDMI)와 미디어이노베이션연구소(IMI)를 설립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미국 MIT 미디어랩과 카네기멜론대 ETC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전세계 최고를 추구한다.
NUS의 IDMI는 현재 100∼200명의 연구진이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크리에이티비티 랩, 주변지능 랩, 혼합현실 랩, 멀티미디어 센싱 랩 등 8개 공동연구실로 구성돼 있다. 해외와의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일본 게이오대학과 조인트연구센터를 설립했으며, 중국과학성과도 협력해 연구활동을 준비중이다. 2006년 7월에는 NUS 할리우드랩을 세워, 학생들의 인턴십을 활성화하면서 미국내 정상급 디지털미디어연구소와의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NTU의 IMI는 전산철학, 무형유산, 디지털행동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올해 안에 6개 이상의 연구그룹을 결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현재 컴퓨터공학, 전기전자공학, 물리·수학,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들이 이곳에서 활동중이다. 40∼50명의 연구진이 소속돼 있는데, 그 수는 해가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여기에선 비주얼 통신, 인터랙티브미디어, 디지털필름메이킹, 애니메이션, 로보틱스 등이 주요 연구과제다.
◇다국적 연구진과 학문적 역동성=싱가포르는 외국인 교수와 학생이 많은 곳이다. 이에 따라 융합연구도 외국인이 중심에 서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 NUS IDMI의 나카츠 료헤이 소장은 일본에서 디지털미디어 연구를 주도하다 지난해 싱가포르에 왔다. NTU IMI을 이끌고 있는 나디아 탈만 교수 역시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오가며 활동중이며, IMI내 인터랙티브&엔터테인먼트연구센터(IERC)를 이끄는 펜실 윌리엄 러셀 교수는 미국인이다. 이밖에도 대다수의 학생이 중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다 이곳을 찾았다.
싱가포르는 서울과 비슷한 면적에 인구가 500만에 불과한 작은 나라답게 변화속도가 빠르다. 따라서 여러 학문이 시너지를 내는 융합연구의 결과물을 실제 현실에 적용해볼 수 있는 테스트베드로서 이만한 곳이 없다고 연구진들은 말했다.
펜실 윌리엄 러셀 교수는 “NTU는 융합연구를 위해 전세계 최고의 연구진을 영입하고 있다”면서 “융합연구는 엄청난 잠재력과 함께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는중”이라고 설명했다.
◇동양의 문화가 살아숨쉰다=싱가포르는 지리적 위치만큼이나 융합연구의 밑바닥에 동양의 문화가 깔려있다. 일례로 NUS IDMI의 연구과제를 하나 소개하면, 공자(Confucius) 컴퓨터라는 것이 있다. 이는 균형과 조화라는 동양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비논리적 컴퓨터 알고리듬이다. 고대 그리스의 논리와 대조적인 것으로, 이 시스템은 음악과 음식, 온라인소셜차트 안에서 역사적철학과 교육을 모델링하고 복원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디지털인터랙티브 안에서 고대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코어는 바로 가상의 ‘공자’다. 비논리적인 친구와 소셜네트워크 통신을 가진 인물로 예를 들면 페이스북과 같은 온라인소셜그룹의 친구 같은 존재다. 2500년 이상 아시아국가들의 철학과 이상에 영향을 미친 유교는 문화적·언어적 장벽으로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공자컴퓨터를 통해서 역동적인 중국 회화과 시각화됐다. 음악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법을 제공했다.
◇기술수준과 가능성은=NTU IERC 연구과제중 ‘타이거트레이닝’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가 연구실을 방문하자 센터장인 펜실 윌리엄 러셀 교수는 화면속의 호랑이를 보여줬다. 이는 가상의 호랑이를 일정 수준의 학습으로 훈련하고, 손과 목소리를 통해 신호를 보내면 다양한 각도에서 호랑이의 움직임을 잡아낼 수 있다. 가상의 애완동물로 활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연구중인 얼굴인식과 물체인식은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펜실 윌리엄 러셀 교수는 “얼굴인식의 경우 현재 성별과 표정을 식별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의상, 화장 등을 구분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물체인식은 목표물에 카메라를 가져다대면 이미지를 인식해 가격을 표시해준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IERC가 연구중인 증강현실내 햅틱 인터페이스는 게임엔진을 적용, 화면속 사람을 터치하면 가상의 인물이 즉각 반응하는 흥미로운 과제다.
◆인터뷰-나카쓰 료헤이(NAKATSU Ryohei) 싱가포르국립대 인터랙티브디지털미디어연구소장
“아시아가 뉴미디어인 인터랙티브미디어의 주도권을 잡았으면 합니다.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인도 등의 많은 연구가 공유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죠.”
나카쓰 료헤이 싱가포르국립대 인터랙티브디지털미디어연구소장은 아시아가 출발은 늦었지만 앞으로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한국의 영화, 중국의 음식 등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가 자랑스럽다”면서 “아시아인들은 아시아인의 행동, 감정을 잘 알기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더 이상 미국만이 이 분야을 주도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방대한 시장을 제공하고 있어 가까이에 있는 아시아 연구진에게 매력이라는 분석도 빼놓지 않았다.
나카쓰 료헤이 소장은 “일본의 변화는 매우 느린 반면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이기에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다양한 학문이 조화를 이루는 융합연구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카쓰 료헤이 소장은 “지난 10년간 우리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새로운 트렌드가 출현했다”면서 “휴대폰, 블로그, 구글 등은 동서양 사람이 모두가 사용한다. 전세계가 통신 인프라를 기반으로 동서양이 행동에서 차이가 없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기술을 요구하고, 또 사용하기를 좋아하게 됐다. 인간의 행동은 매우 복잡하기에 사회과학과 공합의 융합이 중요하다”면서 “지금은 오로지 기술만이 아닌 콘텐츠와 디자인을 접목하는 것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나카쓰 료헤이 소장은 “한국에도 실력있는 교수·연구진이 많아 센터를 설립하고 싶다”면서 “한국 연구진들도 앞으로 더 많은 성과를 내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인터뷰-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고전경제학자들은 예로부터 기술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경제학에서 기술을 소외시하게 된거죠. 이론을 기초로 한 경제학 교과서로는 지난해 터진 세계금융위기를 절대 설명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국립대에서 기술경제학이라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신장섭 교수. 그의 발언 한마디한마디는 신선 그자체였다.
신 교수는 “아담스미스는 분업을 중심으로 생산성 향상을 주장했고, 마르크스야말로 기술경제학의 선구자”라면서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기술을 연구하는 경제학자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도 무늬만 기술경제학”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기술은 원래부터 중요했다. 산업혁명의 중심에 기술이 있었고, 기술이 정치·사회 전분야에 영향을 줬다”면서 “지나치게 수학적 모델링 위주의 연구에 치우친 지금의 경제학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경제학도 결국 기술과 자연스러운 융합이 이뤄져야 학문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장섭 교수의 연구분야는 특이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철강산업을 연구, 후발국의 경제성장과 기술이전과정을 분석했다.
신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철학으로 사람과 우주, 과학을 이야기했으며, 19세기 영국 켐브리지대에는 철학과 역사학 두개 학과밖에 없었다”면서 “학문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지금처럼 분화가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로 영역을 갖춘 학문은 이제 다시 합쳐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신장섭 교수는 “앞으로 세상이 변화하는 추세도 점점 융합연구라는 트렌드를 거스를 수 없다”면서 “일례로 헬스분야를 살펴보면 바이오, 화학, IT가 합쳐져야 진정한 의료분야의 경쟁력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설성인기자 siseo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