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상생이라고 하면 대기업과 협력사 간의 공정한 거래, 동반 성장, 해외 공동 진출 등을 떠올린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대부분 상생의 고민과 실천은 이후 부품과 제조기업 사이 협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아직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국내 가전기업은 협력사와의 거래 관행 개선, 해외 동반 진출 등을 통해 상생을 실천하려 노력 중이다.
LG전자는 중국(2003년), 러시아(2005년) 등 해외 시장에 진출하면서 현지 협력사를 구하지 않고 고무 부품 전문 제조업체인 동아화성과 함께했다. 이는 동아화성이 뛰어난 제품력을 바탕으로 현지 기업과도 거래를 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줘 글로벌 중견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LG전자는 이어 2007년에는 국내 제조업체 중 최초로 공정거래위원회와 대·중소기업 간 하도급 공정거래 협약을 체결하며 상생의 의지를 다졌다. 웅진코웨이는 협력업체와 원가 절감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요 협력업체와 ‘무검사’ 납품을 위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가전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이를 뛰어넘어 서로 발전을 견인·추동하는 새로운 상생 패러다임을 짜야 한다. 신규 시장 진출, 글로벌 유통에서 새로운 상생 철학의 구축은 대기업과 중소가전기업이 글로벌 강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밑바탕이다.
◇대기업, 역할 고민 필요=LG전자가 정수기와 안마의자를 내세워 헬스케어사업에 진출했을 때 중소기업으로부터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정수기 분야는 웅진코웨이·청호나이스·동양매직·교원L&C 등 중소기업이 수년에 걸쳐 개척하고 서비스 시스템을 만든 시장인데다 중소업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LG전자가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와 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로운 소비계층을 만들며 이 분야의 신시장을 창출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가전제품은 정수기 외에도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차별화된 제품 경쟁력과 틈새 시장 공략 노력으로 독자 시장을 만든 제품군이 다수다. 루펜리가 개척한 음식물쓰레기처리기, 유닉스전자의 헤어드라이어, 쿠쿠홈시스와 리홈이 양분하고 있는 전기밥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이와 같이 특화된 가전 분야에 대기업이 한 번씩 문을 두드렸다는 점이다. 최근에도 비데·공기청정기 등 중소기업이 주력하는 사업 분야에 대기업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로 대기업이 해외 개척보다 국내 시장에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진단한다. 또 중소기업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장 규모에서도 대기업이 진출했을 때 잠식이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정수기는 1조원을 넘겼지만, 공기청정기나 음식물처리기 시장은 3000억원 규모다. 대기업이 자본력과 마케팅을 동원한다면 중소 가전업체는 생존을 위협받을 만한 수준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본질임을 봤을 때 대기업이 돈 되는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신규 시장에 진출한 대기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있다.
중소기업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다면 비난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그동안 쌓아온 인지도와 브랜드를 앞세워 시장을 확대하거나 해외 시장 진출의 물꼬를 터주면서 파이를 키운다면 이는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대기업, 멘토 역할 수행해야=중소 가전업체가 대기업에 바라는 것은 ‘멘토’로서 역할이다.
경제적 우위에 있는 대기업이 협력업체에 재정적 지원과 기술적인 지원을 하는 상생의 문화는 어느 정도 형성됐다. 하지만 마케팅이나 해외 시장 경험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으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어한다.
특히 대기업이 진출한 시장과 겹치지 않는 분야에서 경험 공유는 중소 가전업체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다. 최근 남용 LG전자 부회장과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세계경영연구원(IGM)의 ‘리더십스쿨’에서 중소기업 경영자를 상대로 기업 경영의 경험을 공유하는 멘토링 봉사활동을 한 바 있다.
배상민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 연구원은 “대기업의 입장에서도 요즘에는 개별 대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고 기업 생태계 간의 대결”이라며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산업 경쟁력도 있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수평 협력이 상생의 길=상생은 대·중소기업 간의 역할 분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형 가전사에는 경쟁력 향상을 위해 제품 개발·유통·마케팅 등에서 수평적 협력이 요구된다.
일본은 5만개의 중소기업협동조합이 공동판매·구매·수주는 물론이고 기술정보 수집 및 교환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정도로 중소기업 간의 수평적 협력이 활성화돼 있다. 이는 전자·가전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가전업체는 협력해 공통 유통망을 형성했다거나 해외에 진출한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
수평적 협력은 반드시 동종 기업 간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가전기업 밀레는 커피 제조사인 네스프레소와 협력해 캡슐 커피를 추출할 수 있는 최고 사양 제품인 ‘네스프레소 커피메이커’를 출시했다. 네스프레소는 이 협업으로 네스프레소 캡슐을 다양한 커피로 즐길 수 있는 네스프레소 부티크를 유럽 전역에 확산, 자사의 커피를 소비자에 알리고 있다.
밀레는 유럽 전역의 부티크에 ‘네스프레소 커피메이커’를 전시할 뿐만 아니라 주방에서 사용가능한 밀레의 식기세척기·냉장고·플레이트 워머까지 공급하고 있다. 양사는 수평적 협력을 통해 프리미엄 가전과 프리미엄 캡슐커피라는 이미지 재고는 물론이고 상호 이익 증진 효과도 거둔 셈이다.
글로벌 가전기업 필립스 역시 과거 미디어기업인 AOL과 파트너십을 맺고 마케팅과 미디어 활동에서 수평적 결합을 모색한 바 있다. 이 역시 소비자 가전 분야에서 강자인 필립스와 미디어그룹인 AOL의 강점을 살려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소비자를 발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