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환율 헤지 파생상품(KIKO·키코)으로 대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한 업체들이 환율하락으로 이익이 발생하고 있지만 속앓이는 여전하다. 올해 들어 달러 환율이 하락하면서 키코로 인해 평가 이익이 늘었지만, 대부분 업체들이 950원을 기준으로 파생상품을 가입한 상태라 지난해 손실분을 회복하려면 멀었기 때문이다.
내년 환율도 1100원 안팎으로 예상돼 일정 부분 손실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파생상품 손실을 줄이기 위해 환율 하락을 바랄 수도 없는 입장이다. 환율이 떨어지면 달러로 결제하는 제품 원가가 높아져 수출 가격 경쟁력에 빨간불이 켜지기 때문이다.
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에스이홀딩스·이엘케이·미래나노텍·엠텍비젼·KJ프리텍 등 지난해 키코로 많게는 수백억원대 평가손실을 본 업체들이 3분기 환율 하락으로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평가이익을 확보했다. 특히 비에스이홀딩스는 3분기 파생상품 평가이익이 164억원에 달해 부러움을 샀다.
정작 수익을 본 것으로 알려진 회사들은 밖으로부터의 시선이 불편하다. 파생상품 평가이익으로 재무구조가 튼튼해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평가수익은 회계상 수치일 뿐 실질적으로는 이익을 낸 것이 아니라 손실이 줄어든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에스이홀딩스는 지난해 780억원의 파생상품 평가손실이 회계상에 반영됐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돈이 회사에서 나간 것은 아니다. 키코 만기가 도래했을 때 당시 환율로 780억원 정도를 청산해야 한다고 추정한 수치일 뿐이다. 환율 하락으로 3분기 164억원의 평가이익을 기록했지만, 이 돈도 역시 회사로 직접 들어온 게 아니다. 회사 현금 유입 측면에서 볼 때 파생상품의 만기가 도래할 때마다 오히려 갚아야 할 돈이 아직 616억원이나 남아 있는 셈이다.
최근 환율이 1100원 선으로 내려가면서 실제로 나가야 할 돈이 줄긴 했지만, 지난해 손실분을 충당하려면 원달러 환율이 950원선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렇다고 지난해 파생상품 손실분을 회복하기 위해 환율 하락을 바랄 수도 없다. 키코 피해 업체들의 수출 의존도가 높고, 삼성·LG 등 국내 공급처도 달러로 대금을 결제하면서 원화 가치가 오르면 직격탄을 맞기 때문이다.
지난해 키코로 100억원대 손실을 입은 디스플레이업체 관계자는 “차라리 환율이 오르는 것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해 손실분이 손익계산서에 평가손익으로 반영되고 현재는 매월 수억원이 다시 평가이익으로 유입되고 있지만, 원화 가치가 올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생기는 손해가 더 크다”고 설명했다.
3분기 파생상품 수익을 본 회사 한 관계자는 “시장에서는 키코발 훈풍이라고 떠들지만, 현장에서 체감하기에 파생상품 평가이익은 돈을 번 것이 아니라 갚아야 할 부채가 줄어든 것에 불과하다”면서 “환율이 하락해 키코 평가손실이 줄어든다고 해도, 키코피해 업체 중 수출에 영향을 받지 않고 매출과 영업이익이 증가하는 회사가 과연 몇이나 되겠냐”고 반문했다.
다른 전문가는 “우리 기업들이 품질과 기술로 대외경쟁력을 높여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키코 같은 파생상품에 회사 수익성의 목을 매달고 있는 것 자체가 구조적인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형수·차윤주기자 goldlion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