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다섯 번째 이어지는 회의. 의사결정에 시간을 버리는 사이 경쟁사는 이미 소비자 기호에 맞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상품기획 후 셀 수 없는 아이디어 기획회의와 시뮬레이션이 이뤄지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순간은 단 2분. 최종 결재자가 딱지를 놓으면 그마저도 도루묵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부터 기능·재료·원가·부품 조달 가능 여부 그리고 생산상의 제약조건 등 의사결정에 필요한 수많은 정보는 마주치기조차 힘든 누군가의 PC 혹은 수첩 안에 흩어져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있는 신제품 정기회의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동안 시장은 새로운 제품을 원하고 있다. 그마저도 기록은 각자의 수첩에 고이 남는다.
바로 제품 개발을 위한 과정과 지식을 공유하고 축적하며 동시에 이를 활용해 의사결정 속도도 높이자는 것이 모든 제품수명주기관리(PLM)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제품 사양 결정 이후에서 더 나아가 제품의 탄생 이전인 기획단계에서부터 시장 요구와 개발팀의 로드맵이 만날 수 있는 정보의 샘을 만드는 것이다. 제품개발실·연구소의 전유물이었던 PLM 시스템이 연구소의 벽을 허물고 있다.
기술의 상향 평준화가 이뤄진 시대, 기업들은 독립된 섬처럼 존재하던 제품개발 업무가 시장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다음 세대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혈액이 대동맥을 돌며 골고루 영양소를 실어나르는 것처럼, 한 제품이 개발돼 출시되고 단종되기까지 프로세스의 대동맥을 PLM으로 연결하려는 것이다. CIO BIZ+는 제품기획·제품생산·사후관리 등 제품개발의 선·후행 프로세스를 아우르는 발전된 PLM을 구축했거나 구축하려는 대표기업들의 고민과 추진 과정을 심층 취재했다.
◇‘연구소가 열린다’…영업과 R&D의 만남=최근 기업들이 말하는 PLM 시스템은 연구원들만의 협업 프로그램이 아니다. 연구소의 벽을 허무는 소통의 기술이다. 제품 탄생의 앞 단계, 사람으로 치면 태아 시점부터 프로세스를 체계화한 후 연구소와 마케팅·개발·생산·자재구매 등 분리돼 있던 각 부문이 각기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자 한다. 삼성전자·LG전자·현대중공업·CJ제일제당·대상주식회사 등 현재 PLM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진행 중인 많은 제조기업의 핵심 요구다.
PLM 프로젝트를 기획 중인 양경란 LG전자 정보전략팀 R&D IT그룹장은 “최근 신제품 출시 주기가 짧아진데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 어떤 것부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인지, 개발 단계는 물론이고 훨씬 이전 단계에서부터 신속한 협업을 위해 최신 정보의 빠른 공유가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김승석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부 부장 또한 “영업부문에서 특정 형식의 선박을 건조해달라는 고객 주문을 접수시키면 바로 해당 선박의 실제 사용 자재명세 등 정보를 확인해 정확한 견적가를 제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발 이전 단계에서 시장·고객의 반응을 획득하려는 요구는 시장 변화가 빠른 생활소비재(CPG)업계에서 더욱 크다. 원도선 롯데칠성음료 상품개발실 계장은 “PLM 구축으로 영업담당자가 시장의 생생한 반응 정보를 올리는 즉시 상품개발실·중앙연구소 등 유관 부서에서 검토하고 반영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전에 전략적 제품화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시장 최초 제품인지 혹은 변형된 제품인지 등 제품의 유형을 분류한 후 수명주기에 맞는 프로세스를 체계화하고 시장 반응과 각 연구원 PC의 제품화되지 않은 아이디어 등 모든 정보를 축적하면 개발자가 변경되거나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시행착오 없이 개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따로 또 같이’ 모든 정보가 모인다=진화된 PLM 시스템은 개발 이전·이후 프로세스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 볼 수 있지만 각 정보들이 PLM 시스템 내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용자는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활용하지만 이 정보는 PLM이 아닌 다른 업무시스템에 있다.
사용자는 정보의 소재지 즉 전사적자원관리(ERP)인지 공급망관리(SCM)인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정보시스템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용자 편의성을 향상시켜 올바른 방향의 의사결정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다. 또 보고형 연구체제가 아닌 수평적 협업 조직을 꾸려가기 위한 소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양경란 LG전자 그룹장은 “의사결정자들이 필요한 정보를 추출해 전략적 자원 배분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무진들의 부가업무를 줄이는 것도 현 PLM에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개발실이 e메일·전화로 필요한 자재 발주를 구매팀에 의뢰하면 구매팀에서 이를 ERP 시스템에 입력했다. 이제는 도면이나 품의를 작성하는 즉시 자재 정보가 ERP로 전송돼 구매팀에서 바로 확인, 구매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이다. 발주된 자재의 처리 상황도 실시간 파악이 가능해 개발 계획이 스마트해진다.
ERP의 매출 정보를 PLM 시스템에서 그래프화하고 매출 추이를 분석해 단종 및 대체상품 개발과 출시 프로세스로 유연하게 이어지는 것도 가능하다. SCM 시스템과도 연동해 부품공급 현황을 시생산 계획, 제품개발 일정을 생산계획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품질 기준이 엄격한 하이테크기업일수록 시생산은 개발의 중요한 프로세스다.
이현욱 삼성SDI 전지개발1실 부장은 “PLM을 SCM 시스템과 연계하면 부품 공급일정을 파악할 수 있어 영업에서 고객 주문을 접수하면 개발 부문이 SCM과 연동된 정보를 기반으로 초도 양산 일정과 샘플 출하 일정 등 정확한 제품 개발 납기를 제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은 내부 지식관리시스템을 PLM 시스템과 연계할 계획이다. 김승석 현대중공업 부장은 “설계 시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별도 시스템 접속 없이 검색 엔진으로 내부 지식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급증하는 환경규제는 제조업의 주요 이슈다.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환경을 포함한 규제 준수를 만족시켜야 한다. 웅진코웨이는 지난해 자체 유해물질 관리 인증시스템과 PLM 시스템을 연계시켜 연구자들이 수시로 환경 규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향후 특허정보도 탐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제품 개발에 들인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병윤 웅진코웨이 환경기술연구소 연구원은 “소비자들의 AS 접수와 처리 현황까지 PLM 시스템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돈 버는 개발…연구개발도 ‘따져가며’ 한다=개발 자원의 투자 효과도 제조기업들의 고민이다. 원가구조는 초기 개발단계에서 80% 가까이 결정된다. 초기 개발단계에서 원가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돈 안 되는 제품이라면 개발 완료해 시장에 출시하기 전 즉 개발 중에 중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한마디로 ‘돈 되는 개발’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추진 중인 PLM 프로젝트에서 현재의 재료비 중심 원가관리 체제를 개발 자원까지 관리할 수 있는 총원가관리 체제로 전환할 계획이다. 각 제품의 부품과 요소기술에 대한 원가마저도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LG전자 역시 내년 이후 본격화될 PLM 프로젝트에서 개발 프로젝트의 원가관리를 강화한다는 복안이다.
김정욱 액센츄어코리아 전무는 “인력·비용·기술 등 기업의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 관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며 “R&D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합리적인 R&D 자원이 기업 손익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출시 시점의 환경 변화 등을 예측하는 회의 시 예측 기준을 표준화하고 PLM 시스템을 기반으로 같은 데이터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PLM에서 목표원가관리와 개발비 관리를 강화한 삼성SDI는 개발 중에도 매달 한 번씩 판가와 환율의 변동, 재료비 변동 등을 시뮬레이션해 제품 출시 시점의 이익률을 PLM 시스템으로 검증하고 있다.
이현욱 삼성SDI 전지개발1팀 부장은 “매달 ‘컷 오프’ 프로세스를 통해 시장 출시 시점의 이익률이 기대이익률보다 낮아지면 원가절감 활동 계획을 도출해 기대이익률을 달성하고 있다”며 “원가를 맞출 수 없는 과제에는 목표원가관리(TCM) 회의로 과제의 지속성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각 부서가 저마다의 엑셀 파일에서 기준마저 상이한 데이터로 회의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PLM 시스템은 각 업무부서들이 같은 화면과 같은 데이터를 보고 논의할 수 있게 돼 비로소 정보가 소통되고 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