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는 한국, 부품조립은 중국, 판매는 유럽, 자금 운용은 홍콩…’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초국가 기업을 등장시켰다.
“한 나라에서는 조사연구를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부품을 만들고 제3의 나라에서는 이를 조립하며 제4의 나라에서는 생산품을 판매하고 제5의 나라에서는 그 이익금을 예금하는 등의 일을 하는 등 수십 개 국에서 계열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토플러는 “실제로 초국가 기업들은 이미 규모가 매우 커져 그 자체로 몇 가지 국민국가적 특성을 지니게 됐으며 국민정부들을 앞서 움직일 때가 많다”고 직시했다.
프랑스 국제경제학자 프레데릭 클레르몽과 워싱턴DC 정책연구소 존 카버너가 1994년 공동 발표한 논문인 ‘지구자본주의 날개 아래에서’에서 글로벌 시대 주역은 세계 200대 기업이라고 주장한다. 초국가기업의 핵심중 핵심으로 지목한 10대 기업 위상은 국가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통령으로 상징되던 종전의 중앙국가 권력은 실권 없는 군주로 ‘신 봉건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82년부터 10년 동안의 세계 200대 기업 변천사를 분석한 뒤 내린 21세기 결론이다.
삼성, LG 등의 국내 기업들도 정보통신(IT)에서의 경쟁력 우위를 기반으로 ‘초국가 기업’으로 도약했다.
지난해 발표된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삼성전자(40위)와 LG(69위), 현대자동차(87위) 등 3곳이 글로벌 100대 회사 내에 들었다.
매출액(약 73조원)은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7.1%에 해당된다. 연결매출은 지난 2008년 기준 121조2900억원이다. 이 중 81.4%가 수출이다. 부가가치(약 18조6000억원) 기준으로도 GDP의 1.8%에 해당된다.
코리아(KOREA)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삼성(SAMSUNG)의 브랜드 가치는 175억달러를 넘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창립 40돌을 맞아 2020년까지 매출 4000억달러를 달성해 세계 최고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비전 2020’을 발표했다. 브랜드 가치 순위를 기존 19위에서 5위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미 삼성은 세계 180여 개 국가 중 35번째로 ‘나라경제’ 규모를 넘어선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보다 크고, 이란·아르헨티나보다 조금 작다. LG그룹 매출은 세계 48번째 국가이며, 현대차 그룹은 51위, SK그룹은 55위다.
이 초국가기업들은 직원 구성이나 경영 내용상으로도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한다.
삼성전자의 해외 거점은 생산(34), 판매(49), 연구소(21), 기타(90) 등 총 194개에 달한다. 해외지점은 지난 76년까지 뉴욕, 동경, 프랑크푸르트 등 3개에 불과했고 첫 해외생산공장도 82년 포르투갈에 설립한 게 처음이었다. 현재 LG전자의 글로벌 임직원 8만4000명 중 한국을 제외한 5만4000명이 현지인이다.
세계 두뇌 사냥도 이어진다.
지난 6월 LG전자 최고기술책임자 백우현 사장과 기술담당 임원 15명과은 세계 최고의 인재를 찾아 쉼 없이 움직인다. 미국 상위 30개 대학 재학생과 IT기업 경력 엔지니어 150명을 만나면 LG를 마케팅한다. 아예 연초부터는 핵심인력으로 구성된 인재유치단을 만들어 LG전자 소개 투어에 나선다. 이들은 지난해 하반기 일본 상위 대학 10개 학교 100여명을 초청해 테크노 컨퍼런스를 개최, 연구개발(R&D) 인재를 찾았다.
초국가기업 시대에선 기업이 국가를 선택한다. 기업을 지원할 시스템과 인프라를 못 갖춘 국가는 기업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세계의 일류 정부들은 초국가기업을 유치하려 온갖 혜택을 제공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 이상 ‘한국의 삼성’을 기억하는 시대는 지났다. 기업 매출이 국가 국내총생산(GDP)를 초월하고 해외 네트워크로 외교 기능까지 떠맡고 있으며 국가경영에 훈수까지 둔다. 이미 세계는 국경을 초월한 이들 초국가기업의 직간접 영향 아래 재편되고 있다.
영향력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 걸쳐 국경을 초월한다.
2006년 신년호에서 ‘초(超)국가 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s)’을 언급했던 일본 경제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성장력은 국가보다 기업임을 천명했다. 초국가 기업 시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의 명운이 달렸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