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신년특집]관용이 콜럼버스를, 역사를 승리케 했다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열정과 패기의 개척자 콜럼버스는 500년 전 인물이지만 2010년 한국의 기업가 정신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콜럼버스는 그 시절 몽상가로 불렸다. 인도를 발견하겠다는 이상을 품고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1차 항해에 나선다. 두 달이 넘게 이어진 항해 끝에 세 척의 배와 78명의 선원은 10월 12일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한다. 중앙 아메리카의 쿠바 북동쪽 카리브해에 있는 바하마의 산 살바도르다.

 1493년 9월 인도를 향한 2차 항해가 다시 시작된다. 배 16척과 1200명으로 불어난 식구를 끌고 콜럼버스는 두 달 만에 새로 도미니카·자메이카·과테말라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이곳을 일본 부근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실패는 다시 항해로 이어졌다. 1498년 5월 그는 중국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다다른 곳이 비로소 아메리카 대륙, 남미 북단의 트리니다드·토바코·그라나다 등이었다.

 1502년 5월 마지막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1503년 1월 오늘날 중앙아메리카의 파나마에 다다랐다. 그는 이곳을 그리도 애타게 찾던 인도라 믿으며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는 이렇듯 실패와 절반의 성공, 좌절과 재도전으로 기록된다. 번번이 인도 찾기에 실패했고, 마지막에 인도라 믿었던 그 땅도 사실 인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수차례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를 믿고 지지해준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됐다.

 모두가 그의 실패를 조롱하고 새로운 도전을 막았다면 아메리카 대륙은 언제쯤 유럽인에게 알려졌을까. 당시 유럽 사회가 콜럼버스를 실패한 몽상가로 낙인 찍으며 항로 개척을 막았다면 대항해시대로 이어진 인류 역사의 눈부신 발전은 더 늦춰졌거나 아예 기대할 수 없었을 지 모른다.

 그 과정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개척자도 수없이 많았다. 비록 무명으로 사라졌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열정과 뚝심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다다른 콜럼버스는 물론이고 뒤에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 세계 여행에 성공한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상과 좌절, 작은 성취가 새 역사의 거름이 되고 또 다른 씨앗이 되어 움튼 것이다.

 꿈을 가진 벤처인이 새 산업의 거름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와 문화가 절실하다.

 차윤주기자 chayj@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