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의 학문에 얽매이지 않는 융합형 인간 ‘호모 컨버전스’가 주목받고 있다. 전자신문은 한국창의재단과 공동으로 ‘호모 컨버전스-융합형 인간이 뜬다’ 특별기획 시리즈에서 다양한 해외 융합 연구 사례를 소개해 반향을 일으켰다. 해외 사례를 통해 우리의 당면과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짚어봤다. 전자신문은 24일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국내 융합연구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좌담회를 마련했다.
참석자=김문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
원광연 KAIST 문화기술대학원장
정일용 교육과학기술부 미래인재정책관
사회=권상희 전자신문 경제과학팀 팀장
◇사회=전자신문의 호모 컨버전스 기획을 통해 융합 학문의 여러 외국 사례를 연구해왔다. 원광연 원장께서 국내 융합기술 연구 현황을 짚어줬으면 한다.
◇원광연 KAIST 문화기술대학원장=융합의 범위는 다양하다. 비교적 원활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공계 내 인접 분야의 융합도 있고 좀 더 큰 틀에선 인문사회와 이공계의 융합, 예술과 디자인의 융합, 이공계와 예술의 융합 등이 있다. 이공계 분야 내에서의 융합은 정부가 10년 전부터 BK사업 등으로 강하게 드라이브 했다. 타 학제 간 융합은 수년 전부터 조금씩 시작된 것 같다.
◇사회=융합 학문의 목적은 결국 창의적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정책적 지원 추진은.
◇정일용 교육과학기술부 미래인재정책관=창의적 인재는 갑자기 만들 수 있는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부는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창의적인 수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예를 들면 창의적 체험활동을 만들어 교과과정과 연계시키도록 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능력을 뽑아내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또 중요한 건 입시다.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 방식이 아니라 학생이 가진 다양한 능력을 발굴하는 입시가 이뤄져야 한다. 입학사정관제도 그 일환으로 잠재성과 능력을 함께 보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창의적 인재는 대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선발하고 키워주는 프로그램이 나와 줘야 육성이 가능하다. 융합 형태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선도대학을 지정해 지원하는 사업을 내년에 시행할 예정이다.
◇사회=학계와 정부의 많은 노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학제 간 문턱이 너무 높다.
◇김문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본부장=문턱이 높다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좋은 조건이 될 수도 혹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지식은 전문화되고 세분화 돼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학이다. 자연철학에서 분화되고 점점 각 분야로 나뉘는 식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 분할적 지식보다 융합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문명사적 전환이라 할만하다. 여러 이유 중에서도 지식의 존재 형태가 상당히 널려져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 지식들을 어떻게 연접시키느냐가 필수 덕목이 되고 있다. 기존의 학문적 분화가 걸림돌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일용=하버드대는 학부(faculty)라는 개념을 쓰는데 우리는 학과(department) 개념을 주로 사용한다. 하버드대의 학부는 공학·철학·심리학 등이 모여 새로운 전공을 만든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생겨나곤 있지만 아직은 많이 폐쇄적이다. 최근 약간의 변화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배우는 공통과학이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네 분야로 나눠져 있었는데 과학계가 새로운 형태의 융합형 교과서를 만든다고 한다. 자연현상은 어느 한 분야로 쪼개서 볼 수 없고, 복합적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벽을 허물겠다는 과학계의 의지가 고무적이라 본다.
◇원광연=하버드에 있을 때 교수들과 같이 생활하며 느낀 점이다. 특정한 문제가 주어졌을 때 풀이 능력은 서로 비슷했다. 모자랐던 것은 해결 능력이 아닌 문제의 정의 능력이다. 사회와 학문의 변화를 보고 이런 문제가 있을 터이고 어떤 전문가들이 모여 접근해야 한다고 추론하는 능력이다. 예전에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면 소수의 뛰어난 전문가가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제 어떤 사회 문제를 다루려면 건축·교통·인문·사회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오늘날 학제 간 융합은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닌 필요성에 의해 대두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이미 확산되고 있지만 시스템이 잘 바뀌지 않고 있다.
◇사회=이번 호모컨버전스 기획을 통해 해외 사례를 많이 접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주목해 볼만한 사례는.
◇정일용=카네기멜론대 ETC(Entertainment Technology Center)의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다. ‘좌뇌와 우뇌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 특히 ETC는 게임을 통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임으로 배우는 것 중요하다. 다양한 게임 방식을 통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체험학습도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문제 해결 능력도 생긴다. 게임의 기술을 교육과 결합한다면 수출상품으로도 가능성 있다.
◇김문조=이는 매우 현대적 현상이다. 예전에는 공부와 게임이 분리돼 있었고, 다중적 활동이 없었다. 게임이 가진 긍정적 요소는 상당히 많다. 다른 놀이보다 몰입적이고 참여적이며 능동적이다. 문제도 있다. 선정성이나 폭력성보다 더 문제는 단순성과 반복성이다. 게임에는 책이 가진 사고의 여백 이런 게 없다. 게임 중독도 반복성 때문이다. 학습에 잘 활용하기 위해선 그런 부정적인 측면을 지울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
◇원광연=사례들을 보면서 전부 나름대로 의미 있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그 중 하나라도 우리나라에 설립 가능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양성을 중시하지 않고 기존 우리의 가치관이 상당히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좀 더 가치관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한다.
◇사회=벽을 없애는 것 외에 융합연구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노력은.
◇원광연=과학기술은 분류 체계가 매우 엄격하다. 국가가 정해 놓았다. 연구기획서를 제출할 때는 반드시 한 분류에 체크를 해야 한다. 융합적 입장에서 연구하려 해도 세분화된 어떤 한 분야에 반드시 체크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공학도와 디자이너가 공동연구를 하려 해도 꼭 한 분야에 체크해야 하는 것이다. 작지만 꼭 해결돼야 할 문제다.
◇김문조=원광연 원장 말씀대로 구체적인 연구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카테고리에다 귀속을 시켜야 할지에 대해 어려운 점이 많다. 융·복합 학문의 분류 체계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일용=절대 작지 않은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정부가 나서서 적극 개선해 보겠다. 여기 계신 분들의 적극적 의견 개진도 필요하다.
◇사회=최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를 봤다. 영화 속에 공학·사회학·철학·인류학이 다 녹아들어 있었다.
◇원광연=카메론 감독의 원래 관심사가 우주탐험과 수중탐사라고 한다. 그 꿈을 영화라는 매체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에 굉장히 조예가 깊고 실제로 나사의 고문 역할도 하고 있다. 단순히 컴퓨터 그래픽 기술만으론 나올 수 없는 영화고, 카메론 감독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예술적 감성이 결합된 영화임에 분명하다.
덧붙여 모험심이 중요하다. 모험을 장려하고 실패도 용납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보니 남들이 해놓은 것에 안주해 연구하는 형태에서 못 벗어난다. 전산학 분야만 보더라도 굉장히 빨리 발전하고 새로운 화두들이 계속 나오는데, 우리 연구진은 거의 선도적인 역할을 못한다. 그건 개별 연구자의 능력 차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모험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신임 교수가 들어와 꿈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과반수 교수가 좋은 SCI 논문 쓰는 거라고 답한다. 주객이 전도됐다.
◇정일용=실제로 노벨상을 타는 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하고 싶은 분야를 오래 탐구해서 나온 작품의 결과다. 정부도 과학자의 직관력과 탐구력을 믿고 맡기는 지원을 고민하고 있고 확대하고 있다.
◇사회=해외의 우수한 융합 학문 기관들과 협력도 필요해 보인다.
◇원광연=해외 기관들과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모여 새로운 분야 개척도 논의한다. 이 중에는 전자신문에 소개된 카네기멜론대의 ETC나 MIT 미디어랩 등도 포함된다. 그런데 해외 기관 교수들에게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을 소개하면 가장 먼저 하는 대답이 어떻게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냐는 것이다.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서글프기도 하다.
◇정일용=정부는 여러모로 지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WCU를 육성해 세계 유명 대학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또 송도에 외국 우수 융합 연구소가 분야별로 입주할 수 있도록 해 복합적 형태로 지식교류가 이뤄지는 융합학문의 클러스터도 추진 중이다. 다만 중요한 건 어쨌든 정부는 옆에서 지원하는 것이고 대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김문조=해외 협력을 위해 근본적인 문화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한국 사회가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했다. 받는 나라였을 때는 우수 사례를 따라잡는 때였다. 하지만 이젠 주는 나라가 됐고 잘 줘야 한다. 협력 상대방 국가의 감성을 잘 관리해야 한다. 잘 사는 나라, 우리가 따라잡고 싶은 나라에게만 잘해주고 그렇지 않은 나라를 홀대하던 예전 방식으론 주는 나라로서 훌륭한 대외 협력을 이루기 힘들다.
◇사회=융합기술이 결국은 산업계에 적용돼야 하지만 아직 산업현장까지는 퍼지지 못하고 있다. 산업계와 연계하기 위한 방법은.
◇원광연=사실 산업계는 학계에서 얘기하는 학문 분야에 별로 관심 없다. 상품을 만들기 위한 최적의 요소만 추구할 뿐이다. 그런데 최근 기업체에서 나오는 서비스나 제품이 한 분야의 전문성으론 만들기 힘들다. 문화와 기술이 결합된 전자상품들만 봐도 그렇다. 많은 기업이 학계에서 배출되는 전문가는 많지만 쓸 만한 인력이 많지 않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결국은 융합학문이 산업계에 필요하다는 의미다.
◇김문조=산업계에서 융합을 선도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니까. 물론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압력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일례로 자동차를 보면 포디즘의 전형에서 다양한 디자인과 컬러가 추구되고 있다.
◇사회=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정일용=정부도 융합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결국 전반적인 문화적 인식 변화가 동행돼야 한다. 언론에서도 여론을 선도하고, 기업도 직장 내 조직 분위기를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한 조직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원광연=창의성이 핵심 이슈다. 이를 핵심화하기 위해 다양성에 관용을 가지고 이질성의 불편함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꽃 피우기 위해선 전문성이 기반이 돼야 함은 틀림 없다. 융합학문 논의는 개인과 사회 차원의 전문성을 전제하고 이야기 되는 것이다.
◇김문조=창의적인 분야에 도전하다보면 리스크가 높다. 실패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있어야 하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융합이 트렌드처럼 되고 있는데, 과도하게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표피적이고 수동적으로 외국 따라하듯 하면 안 된다. ‘융합 물신주의’는 경계해 마땅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원광연 원장 말씀대로 전문성이 전제가 돼야 한다. 고대 사회의 미분화와 현대의 ‘탈분화’는 다르다.
◇사회=국내 융합연구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학문적 제언이 논의된 유익한 자리였다. 앞으로도 융합 연구 발전에 힘써 주시길 바라며 좌담회를 마치겠다.
정리=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