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스포럼] 국제표준의 중요성과 표준화 전략](https://img.etnews.com/photonews/0912/091229044242_1264556450_b.jpg)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이겼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표준’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군은 흑인 노예를 거느리고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던 농장주들의 돈으로 선진 유럽 국가의 발달된 무기를 사들여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다. 반면에 북군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서 선진 무기는 수입할 수는 없었지만 성능은 약간 부족하나마 무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었다. 전쟁이 한동안 진행되자 남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포탄은 쌓여 있으나 그 포탄을 사용하는 대포는 고장이고, 멀쩡한 대포에는 그 포탄이 맞지 않고, 고장난 대포를 수리할 부품도 없었다. 반면에 북군은 모든 무기가 표준화돼 있어 어느 대포든 포탄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고, 고장난 대포가 몇 대 있으면 쓸 만한 대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표준 분야에서 이 같은 ‘상호 운용성’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행정용 인터넷전화에 KS인 ARIA를 넣으려던 계획에 미국의 통신장비 업체 등이 ARIA는 국제표준이 아니므로 외산 인터넷전화의 도입을 막는 ‘불공정 규제’라고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 행정용 인터넷전화에 그들이 원하는 AES를 사용하고 있다. 왜 ARIA가 국제표준이 되지 못했을까.
‘표준화는 합의(Consensus)’라는 말이 있다. 즉, 다른 나라나 다른 회사들도 다 합의해 줄 수 있어야 표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ISO/IEC 18033-1 암호 알고리듬 Part 1-일반’의 부록에는 어떻게 암호알고리듬을 표준화할 것인지 나와 있다. 그중 일반적 표준화에 적용될 만한 것들만 언급한다. 이미 많이 채택된 것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합의되기 쉽다. 또 다른 표준단체에서 이미 표준화돼 있는 것, 성능이 좋은 것, 특허가 나와 있을 때 공정하게 사용인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데 유리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동일 표준은 ‘상호운용성’을 위해 그 수가 적어야 하나 특별한 환경에서 특별히 좋은 성능을 보이면 표준 수를 늘려 그 기술이 채택되기도 한다.
여기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합의를 이루는 데에 중요한 요인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힘’이다. 미국 국가표준이 된 것은 거의 다 국제표준이 되는 데 문제가 없다. 그 힘을 얻기 위해 당장의 직접 이익이 없더라도 꾸준히 국제표준화회의에 참석해 다른 나라·회사 대표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두는 등 이른바 ‘외교’도, 기타의 전략을 잘 세워서 표준화에 임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하나는 ‘타이밍’이다. 시기를 잘 택하면 합의가 쉬워진다. ARIA도 기존 표준에 비해서 2∼3년만 일찍 개발됐다면 국제표준화를 이뤘을 것이다.
표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들어 놓은 표준을 잘 사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암호 알고리듬을 국제표준화하는 시점에 국산 알고리듬인 SEED를 애써 넣어 놓았다. 비록 ARIA보다 개발 시점이 일러 그 성능이 다소 떨어진다 해도 행정용 인터넷전화에 SEED를 사용하겠다고 했으면 미국이 ‘국제표준이 아니므로 불공정규제’라는 핑계로 압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기업이 국제표준화 작업에 선도적이지 못한 나라에서 대학교수와 연구원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SCI 논문보다도 국제표준을 하나 만드는 것이 열배 백배 더 중요한 일이다. 이들이 국제표준에 나설수 있는 합당한 환경조성도 시급하다.
이필중 포스텍 교수/pjl@poste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