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안경 2.0

[이머징 이슈] 안경 2.0

 2010년은 안경이 광학기기에서 첨단 IT제품으로 진화한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지난 13세기 베니스의 유리장인이 처음 발명한 안경은 오랜 세월 인간의 시력을 보조하는 도구로 널리 애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첨단 IT와 결합한 모니터 안경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른바 ‘안경 2.0’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제 안경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연결하는 마법의 도구이자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의 최대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안경은 다리가 편해야 합니다.” “이번에 안경 공부 많이 했습니다.”

 미국 CES쇼 소니부스에서 이건희 전 회장이 3D TV 안경을 써보고 착용감을 지적했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안경 공부를 많이 했다며 다소 엉뚱한 대답을 했다.

 기이한 선문답 속에는 해외 전시회에 와보니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휴대형 광학기기(안경)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됐다는 뉘앙스가 묻어난다. 눈에 편하고 입체감이 더 느껴지는 3D 안경을 먼저 만드는 회사가 거대한 3D TV시장을 선점할 것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향후 수년간은 3D TV를 시청하려면 입체안경의 착용이 필수다. 현재 LG전자, 삼성전자, 소니, 파나소닉 등은 자사 3D TV 기종에 최적화된 안경 개발에 적극 매달리고 있다. 따라서 가전업체가 브랜드 가치가 높은 안경테 또는 선글라스 제조사를 전격 인수하고 안경시장에 뛰어든다고 발표해도 과히 놀랄 필요가 없다.

 미래 안경은 TV, 영화의 입체감을 높이는 보조수단을 넘어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융합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해낼 전망이다.

 이 같은 안경의 진화는 요즘 국내서 화제를 모으는 아이폰의 증강현실(AR) 애플리케이션에서 뚜렷한 조짐이 나타난다. 아이폰 카메라로 주변 건물 등을 촬영하면 다양한 지리정보가 실제 영상 위에 겹쳐서 뜨는 식이다.

 지금 10시 방향의 △△빌딩 뒤로 100m만 가면 스타벅스 커피숍, 1시 방향으로 300m 앞에는 ○○지하철역, 3시 방향으로 150m 이동하면 내 차를 주차한 장소가 있다. 이용자는 낯선 도시에서 증강현실 SW를 설치한 아이폰이 보여주는 나의 위치와 주변 정보,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 등을 믿고 따라가면 된다. 심지어 아이폰 카메라로 주변을 촬영하면 근처에 있는 친구들의 실시간 위치를 찾는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고객들은 아이폰의 GPS와 카메라를 이용한 증강현실 세계에 열광하고 있다. 맨눈으로 세상을 볼 때와 달리 아이폰 액정에 비친 증강현실 화면 속에는 일상에 필요한 온갖 정보가 가장 직관적인 형태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폰은 고객 눈에 씌워진 안경처럼 세상을 관찰하는 광학도구의 구실을 한다. 고객들의 증강현실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아이폰이 구현하는 증강현실 환경은 마치 필름식 카메라를 찍듯 손으로 꼭 잡고 있어야 하기에 불편하다. 따라서 애플은 향후 수년 내에 아이폰과 연동하는 모니터 내장형 안경(아이글라스?)을 출시할 가능성이 높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가까운 미래에는 스마트폰과 연동하는 안경을 쓰기만 해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파티 석상에서 어딘지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때에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똑똑한 안경을 쓴 당신의 망막에는 해당인물의 상세한 신상정보가 문자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안경은 인간의 시각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가장 성공적이고 오래됐으며 휴대하기 편한 디자인이다. 따라서 디스플레이 업계가 정복해야 할 차세대 영상시장의 제일 높은 봉우리는 벽면을 가득 채우는 대형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복고풍의 안경이 차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

 ◇모니터 안경의 기술현황=이제 안경은 유리렌즈를 끼운 광학도구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동안 시중에 출시된 안경형 모니터는 사용자가 바깥 풍경을 전혀 볼 수 없는 초소형 모니터에 불과했다. 이 같은 기술적 문제를 극복한 차세대 모니터 안경이 올해부터 본격 시판에 들어간다.

 일본의 브러더공업은 안경처럼 생긴 망막주사 디스플레이(RID:Retinal Imaging Display) 기술을 개발했고 2010년에 상용화할 계획이다.

 RID란 눈에 들어가도 안전한 밝기의 광신호를 직접 망막에 고속으로 주사해 잔상효과로 정보를 알려주는 첨단 영상투영기술이다. 망막에 투영된 영상은 마치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RID의 최대 장점은 고객의 시야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 투시형 광학기기라는 점이다. 매우 작고 가볍기 때문에 안경처럼 만들기 용이하다. 또 외부인을 신경쓰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안전하게 볼 수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킬러 로봇이 목표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얼굴을 대조하는 장면이 실제로 재현된다고 보면 된다.

 NEC는 브러더공업과 손잡고 일명 ‘통역 안경’을 개발 중이다. 사용자는 통역 안경을 쓰면 거의 실시간으로 상대방의 말을 통역한 내용을 읽으며 상대방과 대화할 수 있다. 눈에 빛을 직접 쏘지만 피로하지 않도록 밝기를 적절히 조절했다. NEC는 RID를 이용한 안경형 제품이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아이폰으로 유행한 증강현실의 여파로 게임 속 여성들과 제스처를 나누는 성인용 게임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용자는 손짓만으로 가상현실 속 여자주인공의 볼을 잡아당기는 등 짓궂은 장난도 가능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니터 안경을 착용하면 사이버 섹스의 전 단계까지 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안경 2.0의 미래=안경의 진화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2007년 일본에서 방영된 SF애니메이션 ‘전뇌코일(Coil a Circle of Children)’은 안경 2.0시대에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만화의 배경은 그다지 머지않은 2020년대며 시력이 좋은 사람도 누구나 ‘전뇌안경’이란 특수안경을 갖고 다닌다는 것이 중요한 설정이다. 이 안경을 쓰면 현실세계에 증강현실을 덧붙여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전뇌안경은 요즘 휴대폰을 대체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전뇌안경은 TV나 문자정보가 눈앞에 뜨는 모니터 안경의 단계를 훨씬 넘어섰다. 이 안경을 쓰면 심지어 전뇌 펫이라는 가상의 애완동물까지 현실세계에 겹쳐서 나타난다. 안경을 쓰면 가상의 애완견이 눈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장면이 보이고 안경을 벗으면 사라진다. 사람들은 특수안경을 상시 착용하면서 현실세계와 사이버공간이 뒤섞인 기묘한 시공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만화는 머지않아 현실세계와 사이버 공간이 합쳐질 것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로 큰 화제를 모았다. 전뇌안경은 이미 기술적으로 상당부분 구현이 가능하며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하루종일 쓰고 다니는 안경의 기술적 진보는 인간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미래학자 제롬 글렌은 2020년대에 안경보다 휴대성이 한 단계 더 뛰어난 콘택트렌즈 형태의 극소형 모니터가 널리 보급돼 대중이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통해 24시간 사이버 세상과 연결되는 접속환경을 가리켜서 ‘사이버 나우(Cyber Now)’라고 명명했다.

 우리 선조들은 안경을 쓰면서 나이가 들어도 글자를 읽고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인들도 안경 2.0시대에 자나 깨나 특수안경을 휴대하고 작업장, 학교, 사무실에서 비약적인 업무능력의 향상을 경험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비치는 가상과 현실세계가 어우러진 기이한 풍경에 점점 익숙해지고 중독될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