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4월 씨앤에스테크놀로지(대표 서승모)가 국내 반도체 개발기업(팹리스)으로는 처음으로 상장한 뒤 10년이 흘렀지만 국내 팹리스 산업은 최근 매출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등 심각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인수합병(M&A)과 인프라 확충, 인력 양성 등은 물론이고 수요 대기업의 투자 확대와 같은 대대적인 정책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오는 2015년께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서 300억∼330억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구두선에 머물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13일 업계 따르면 국내 팹리스 산업은 지난 10년간 외형상 크게 성장했으나 스타기업 부재, 특정 대기업 의존도 심화 등으로 성장에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최근에는 역성장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조사 결과 국내 팹리스기업의 연 매출 규모는 지난 2000년 2000억원에서 지난 2008년 1조7000억원으로 8.5배 성장했다. 팹리스 기업 수는 같은 기간 115개에서 181개로 증가했다. 상장기업 수 역시 지난 2000년 2개사에서 22개사로 늘어났다.
그러나 지난 2005년 이후 매출은 정체기에 접어들었으며 특히 지난해에는 전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팹리스 기업들은 매출 2000억원 벽을 돌파하지 못한 채 여전히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코아로직(대표 서광벽)이 지난 2006년 1900억원대를 기록한 이후 모두 2000억원 벽 앞에서 뒷걸음질했다. 지난해 기대됐던 실리콘웍스(대표 한대근)도 이 벽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아라리온과 엠씨에스로직은 상장 폐지됐으며, 나스닥에 상장돼 관심을 끌었던 픽셀플러스도 지난해 나스닥에서 퇴출됐다.
반면에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팹리스를 시작한 대만은 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미디어텍이라는 회사는 지난 2008년 매출 3조원을 돌파해 같은 해 국내 전체 팹리스 기업 매출액인 1조7000억원의 두 배에 이른다. 우리가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던 중국도 선전해사반도체유한공사가 지난 2008년 매출이 5000억원을 기록했다.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사장은 “디지털 쪽에서 공정이 미세화되면서 개발 비용이 크게 늘어났지만 우리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에 이르지 못해 악순환을 거듭한다. 기업 M&A 등을 거쳐 사업 규모를 늘리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 사장은 이어 “시스템반도체(SoC)는 통합칩이 개발되면서 기존 칩들은 퇴출될 수밖에 없으므로 업체마다 특화된 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대근 실리콘웍스 사장도 “순수 반도체 제조(파운드리) 업체가 있는 대만에 비해 국내에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며, 우수 인력이 많은 대만에 비해 인력 수급도 쉽지 않다”면서 “전문 파운드리를 키우는 것, 우수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미 규모의 경제에서 뒤처진 만큼 국내 수요 대기업이 팹리스 기업에 지분을 투자,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방안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LG디스플레이가 LDI칩 업체인 티엘아이에 지분 투자한 사례와 하이닉스가 실리콘화일의 주식 취득을 통한 지분 투자 등의 상생 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삼성·LG 등 세트기업이 있으면서 세계 30위권의 팹리스 기업조차 없는 아이러니가 오늘의 팹리스 현실이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
스타기업 부재, 특정기업 의존도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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