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는 2010년에는 한국경제에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과거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빠르게 수렁에서 벗어나는 기폭제가 됐던 벤처도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았다. 제2의 벤처시대를 열기 위해 본지는 기획시리즈를 마련, 정부의 벤처지원책, 벤처의 역할과 과제를 재점검한다. 또 해외의 벤처정책 및 성공사례도 살펴보고 한국 벤처의 나아갈 길을 조망해 본다.
“(벤처) 버블의 붕괴는 기술 붐의 종말이 아니라 그 시작의 끝이다.”
2001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CEO가 한 행사장에서 언급한 말이다. 나스닥이 폭락하고 수많은 벤처기업이 문을 닫으면서 더 이상 벤처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때다.
8년여가 지난 지금, 그의 말은 100% 옳았다. 바로 MS가 그의 말을 입증했다. 구글 등 수많은 벤처기업이 그의 믿음이 허상이 아님을 보여줬다.
하지만 벤처 버블 붕괴를 미국과 함께 경험한 우리는 실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초라하다. 그동안 그들의 성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그리고 속으로 ‘우리도 충분히 고심했던 아이디어고 해낼 수 있었던 기술과 상품이었다’고 되뇌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글로벌 성공 벤처를 발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우리는 수많은 벤처기업의 탄생과 몰락을 지켜봤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값진 실패를 너무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결과만을 보며 ‘벤처는 안된다’는 결론을 일찍 끌어냈다. 이 때문에 당시 세계 유일의 기술로 세계 최고가 되겠다며 밤낮을 잊고 기술개발에 나섰던 수많은 젊은 벤처 CEO들은 지금 너무나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당시 벤처 CEO 모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돈(자본)·정치와 연루된 사건(벤처 게이트)이 터졌듯이 당시 주체할 수 없는 돈으로 기업인이 정도를 벗어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일부다. 전체로 몰고 가서는 안 될 일이었 건만 우리 사회는 ‘벤처’라는 용어 자체를 그 후 오랫동안 색안경을 쓰고 쳐다봤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중소기업은 무조건 ‘벤처’로 표현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새로운 벤처의 등장을 막았다. 벤처 실패사례가 너무나 부각됐고, 사회에서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인 이민화 기업호민관(KAIST 초빙교수)은 “젊은이들이 창업을 하지 않는 것은 과거 벤처의 학습 효과 결과다. 벤처에 도전했다가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1년 빌 게이츠 MS CEO의 말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금이 다시 벤처 붐을 일으킬 적기다.
2000년 전후 우리나라 벤처 붐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듯이 2008년부터 미국에서 시작한 글로벌 경기침체는 벤처에 과거의 영광 재현의 기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근 방한한 크리스토퍼 마인스 포레스터리서치 수석부사장은 글로벌 IT산업이 1990년대와 같은 고성장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IT산업의 경기를 보면 주기가 있다. 2001년 이후 성장 둔화기였지만 다시 빠르게 성장하는 시대가 곧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점으로 올해를 마인스 부사장은 주목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정부도 캐치했다. 지난해 12월 정부는 ‘제2기 벤처기업 육성대책’을 발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배경이다. 그때까지 청와대에서는 ‘벤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동안 이렇다 할 벤처지원책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집권 절반을 앞두면서 ‘참신’ ‘창의’ ‘혁신’ ‘창조’ 개념을 찾기 시작했다. 일자리 창출 그리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답은 ‘벤처’에 귀결됐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비상경제대책회의 직후 2기 벤처기업 육성대책을 발표한 홍석우 중소기업청장은 “이번 대책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벤처기업의 창업 및 성장 촉진이 가장 중요하다는 범정부적 공감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벤처 붐을 조성하기 위해 나섰다”고 설명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 벤처기업 대표도 “대통령을 포함해 주요 부처 장관들의 벤처업계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벤처업계에는 ‘기회’가 찾아왔다. 저력을 보여야 한다. 정부는 뒤에서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과거와 같은 엄청난 자금 지원은 없다. 대신 벤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의지와 뜻이 있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벤처는 그에 맞게 고위험고수익(하이리스크하이리스크)이라는 벤처정신을 적극 발휘해 묵묵히 달려나가야 한다.
최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재조명받고 있다.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1993년 6월 신경영 선포), “삼성전자 신수종 사업은 아직 멀었다. 까딱 잘못하면 구멍가게가 된다”(2010년 1월 CES 행사장) 등의 발언이 대표적 예로 꼽힌다. 이는 분명 벤처기업에도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삼성이라는 거대그룹도 혁신·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고 그 결과물이 현재다. 벤처는 순발력으로 대변된다. 수많은 절차와 과정을 밟아야 하는 대기업과 달리 한두 단계로 바로 진행할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펼칠 수 있는 곳이 바로 벤처다.
최근 생산경제시대가 지식경제를 지나 창조경제시대로 진입했다는 평가다. 생산·지식경제와 창조경제 차이는 고객 의견의 수렴 여부다. 지식경제시대까지는 고객 의견이 동일하다고 봤지만 창조경제는 고객 한명 한명 의견을 반영해 제품화한다. 당연히 소수 인력의 벤처기업에는 기회다.
최근 열린 벤처 신년하례회에서 서승모 벤처기업협회장, 배희숙 여성벤처협회장, 도용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 등 벤처 유관 협·단체장들은 업계를 대표해 “벤처정신의 부활이 활력을 잃은 우리 경제의 해답이다. 벤처가 국가경제의 허리역할을 수행해 어려운 경제상황과 일자리 창출을 타개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자”고 말했다.
다시 시작이다. 2000년 전후 벤처 버블기 이후 쓰디 쓴 고통이 재도약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한국 벤처업계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2012년까지 2기 지원책으로 1만개의 벤처가 새롭게 탄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이들 신생벤처는 2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과거 2000년 전후 벤처 창업 열기를 돌아보면 그 이상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벤처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벤처의 도전정신이 다시 빛을 내는 순간 한국 경제는 분명 또 다른 변화와 혁신을 맞게 될 것이다.
특별취재팀 권상희 차장(팀장) shkwon@etnews.co.kr 신선미·김준배·설성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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