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특별인터뷰-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https://img.etnews.com/photonews/1001/100128111953_1362684529_b.jpg)
사물놀이 연주가 네 명이 각자 꽹과리·북·장구·징을 신명나게 두들기며 사물놀이 난장을 벌인다. 가만있자.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모두 김덕수 사물놀이 연주가다. 어찌된 것일까. 알고보니 실제 김덕수는 장구를 치고, 나머지 세 명은 미리 찍어둔 가상현실 홀로그램이란다. 명창 안숙선의 노래 도중에 매화가 피어 객석으로 꽃잎이 흐드러지는데 이것도 첨단 3D 영상으로 구현된 것이다.
무대에서 실제 사물놀이 연주자가 3차원 홀로그램 가상현실과 만나 시간을 뛰어넘어 4차원(4D) 앙상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금발의 늘씬한 서양 여인이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현대적인 춤을 추는가 하면, 비발디의 ‘사계’도 흐른다. 여기에 더해 전통의 사물놀이가 첨단기술의 무대에서 펼쳐져 새로운 멋과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예술과 기술이 융합한 새로운 공간이 완성된 것이다.
31일까지 서울 사직동 광화문아트홀에서 열리는 ‘디지로그 사물놀이-죽은 나무 꽃 피우기’ 공연의 한 장면이다.
내용과 형식이 범상치 않은 이 공연의 대본은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현 경기창조학교 명예학장, 전 문화부 장관)이 썼다. 일찍이 ’디지로그’란 말로 디지털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한 화두를 던진 그는 이번 공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전자신문 미래팀은 이어령 이사장을 만나 이번 공연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듣고 그 내용을 질문답변 형식으로 정리했다.
-이번 공연도 ‘디지로그’의 일환인가.
▲그렇다. 흔히 내가 말하는 ’디지로그’를 무작정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주장하는 디지로그는 인간의 신체성을 디지털을 통해 연장하는 것이다. 즉 신체라고 하는 것과 사이버, 디지털 세계를 잇는 인터페이스(interface)의 문제다. 아이폰이 전 세계적으로 환영받는 이유도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한 사이버 스페이스를 나와 일치하도록 만듦으로써 신체성을 획득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디지로그라는 개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기술은 손목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번 공연도 그렇다. 사물놀이 소리의 강도, 연주자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기술을 활용해 연주자들의 공연 형태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실시간으로 영상, 공연 현장이 변하게 된다. 무용가 국수호와 명창 안숙선이 홀로그램으로 출연해 가상현실 속에서 가무악을 융합한 새 연희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디지로그다.
-오랫동안 디지로그를 말했지만 신체성의 확장이란 개념은 또 새롭다.
▲비트, 디지털이라는 것은 신호체계고 물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다. 의미는 그냥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늘 얘기하는 것은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디지털, 그것이 바로 디지로그다. 5년 전 차세대 게임기로 주목받았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가 객관적인 하드웨어 성능 면에서 한참 달리는 닌텐도 위(Wii)에 참패한 것도 인터페이스를 통한 신체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션 센서 컨트롤러를 통해 나를 게임 속에 몰입하게 하는데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디지로그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론을 내가 5년 전에 이미 선언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감각에 딱 맞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디지로그를 완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따끈따끈한 정보’라는, 흔히 하는 말 하나만 생각해 보자. 어떻게 ‘의미’라는 정보를 촉각과 이렇게 절묘하게 결합할 수 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디지로그 감각을 타고난 사람들인데 아직 디지로그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이번 공연에서 동서양의 조화, 미래와 과거의 어우러짐이 돋보인다.
▲기존 인식으로는 어우러지기 힘들 것 같은 사물놀이와 배꼽티를 입은 여인의 격렬한 댄스가 원래 짜맞춘 것처럼 이렇게 기막히게 어울릴 수가 없다. 이런 것이 동서화합이 아닌가. 이런 것이 바로 이른바 다이버시티(다양성)다. 로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로컬리티를 가지고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새로운 디지로그 아트를 만들고자 했다. 아울러 장구(봄), 북(여름), 꽹과리(가을), 징(겨울)으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세계 무대를 겨냥한 퓨전 스타일도 추구했다. 하지만 메시지 자체는 대중적이다. 디지털 문명으로 피폐해진 지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오늘날 우리의 감성을 다시 일깨워 새 환경에서 다시 꽃피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는 내가 새천년준비위원장 당시 2000년과 함께 탄생한 ‘밀레니엄 베이비’의 모습과 울음소리를 전 세계에 전파한 것과 동일한 의미다.
-‘디지로그’를 이번 공연에서 얼마나 구현했다고 보는가.
▲아쉽지만 이번 공연이 보여 주는 것은 디지로그의 초보 중의 초보다. 얼마든지 아이디어가 있다. 아이디어는 전 세계 어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홀로그램이 아니면 절대 보여주지 못하는 것, 우리가 아니면 절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하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자금이나 공연무대 등에 한계가 많았다.
-홀로그램 영상 때문에 이번 공연을 영화 ‘아바타’와 비견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장에 있는 관객 입장에서는 나의 환경에 직접적으로 3D가 들어오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오감만족을 주려고 한 것으로 절대 3D 영화와 같지 않다. 3D 영화는 순전히 시각에 부담을 준 것이다. 문명에서 하나였던 오감을 전자환경이 갈갈이 찢어놓았는데, 그걸 다시 통합하도록 한 것이다. 단순한 사이버 세계는 좀비 세상과 같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아바타’의 성공으로 자꾸 3D 영상에만 집착하고자 하려는 경향이 보이는데 우려스럽다. 솔직히 3D 기술은 우리가 한참 뒤처지는데 왜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우리만의 감각으로 새로운 시각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이란 개념을 굉장히 강조한다.
▲점차 인간 생명의 놀라움과 신비함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보이는데 그걸 왜 버리려고 하는 것인가. 이제는 인류가 가져온 36억년의 추억에 더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여태까지 생명을 코스트 제로로 보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생명을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보는 생명자본주의가 핵심이 돼야 한다. 이번 공연 역시 생명의 장엄함을 느끼도록 한 것이며 문명의 사계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생명소리가 혈관을 흐르게 되고 인성 파괴로 죽어가는 문명의 나무에 꽃을 피게 함으로써 DNA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생명을 눈뜨게 하고 마지막엔 땅을 밟는 울림인 탭댄스로 관객들이 이런 감정을 충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관객들이 이 점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