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탄생 100주년] "기술을 지배한 자, 결국 세계를 지배하다"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된 삼성상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벤처기업이 됐다. 72년 만에 기업 외형은 97만배 커졌다.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뜻하는 삼성은 그 이름처럼 세계 최강의 전자업체로 변모했다. 그 한가운데 경영의 달인으로 불리는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이 있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지난 50여년간 37개 기업을 설립·인수했다. 1987년 타계할 때까지 호암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라는 세 가지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했다. 호암은 글로벌기업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반도체·전자 강국을 위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

 

 ◇전자산업 진출=호암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가이자, 모험가였다. 1960년대 초 삼성물산 도쿄지점에 특명이 내려졌다. TV·라디오 등 가전공장 건설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조사하라는 임무였다.

 도쿄지점은 1965년 ‘한국 TV·라디오공장 건설계획’이라는 기획서를 호암에게 보고했다. 월 평균 TV와 라디오를 각각 3000대, 5000대를 생산하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1968년 신훈철씨를 팀장으로 한 전자사업팀이 구성됐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호암은 전자산업에 진출하면서 그 성공요소를 경영력과 자본력·기술력 세 가지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시 삼성이 갖지 못한 기술 확보에 매달렸다.

 호암이 생각한 해법은 일본 산요, NEC와의 제휴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산업에 진출하면서 부족했던 기술력을 전략적 제휴로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호암은 이와 함께 미국에서 활동 중인 김완희 박사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기술 확보가 성사되자 이번에는 경쟁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당시 국내 전자업계는 라디오·TV를 만들어 내수 시장에 집중하는 구조였다. 삼성의 진출에 업계의 반대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공업협동조합을 비롯해 당시 금성사(현 LG전자)의 반발도 거셌다. 하지만 호암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결국 삼성은 ‘수출에 전념한다’는 조건으로 TV 시장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 판매 금지라는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 출발이었다.

 1971년 1월. 한국산 TV가 국내 최초로 파나마행 수출 비행기에 실렸다. 삼성산요전기가 최초로 생산한 흑백TV(모델명 P-3202)였다. 호암이 1969년 차세대 먹거리 발굴 차원에서 전자사업에 진출한 지 2년 만의 쾌거였다.

 1979년에는 한국 최초, 세계 네 번째로 VCR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VCR는 최첨단 전자제품이었다. 삼성의 TV사업은 이후 거침이 없었다. 1976년 국내 최초 컬러TV 생산에 성공했고, 1978년 세계 1위 흑백TV 생산업체로 올라섰다.

 ◇반도체산업 진출=1960∼1970년대 전자 및 반도체산업 진출은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반도체를 기반으로 오늘날 삼성을 만들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미래를 고민하는 전략적 리더였던 것이다. 호암에게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산업의 총아였다.

 1970년대 말 이병철 회장은 대용량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기흥에 공장용지를 확보하고, 미국 개발법인 SSI를 설립했다. 기술은 미국 마이크론에서 도입했다. 전자산업 진출 당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반대와 반발에 부딪혔다. 게다가 사업도 순조롭지 않았다. 반도체는 1977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후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런 와중에 호암이 불쑥 반도체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목적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연구원들의 모습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반도체사업에 대한 직원들의 모습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도체사업이 실패하면 삼성도 없고, 나라도 없다는 절체절명의 고민이 연구원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은 허탈감이 가득했다.

 호암의 강한 질타를 받은 연구원들은 이후 64㎞ 야간행군을 하면서 64kb D램 개발 각오를 다져 나갔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83년 마침내 ‘64킬로비트(kb) D램’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일본 다음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였다.

 1985년 5월 21일. 256k D램 반도체 2라인 준공식에 참석한 이병철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양손에 하얀 장갑을 낀 그는 귀빈들과 함께 준공을 기념하는 하얀 줄을 힘껏 당겼다. 반도체사업이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는 등 신규사업이 안정궤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의 표정에서는 먼 미래를 향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1983년 3월 당시만 해도 생각지도 못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삼성의 운명을 건 일대 모험은 적중했다.

 

 ◇호암, 그는 누구인가=호암은 철두철미한 전략가이자, 사람을 중요시하는 용인술의 달인이었다. 국가관도 투철했다. 타계하기 1년 전 참석한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는 그의 국가관이 묻어난다. “영원한 기술 혁신과 첨단 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말로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융성을 약속해 준다.”

 그에게 국가와 삼성은 하나였다. 이 같은 기업관은 나라 잃은 슬픔을 뼈저리게 경험한 학습효과 때문이었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지는 경술년에 태어난 그에게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사자성어는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절대선이자, 최고의 가치였다. 사업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은 그의 일생을 흐르는 철학 중 하나였다.

 호암의 삶은 유난히 일본과 인연이 깊다. 그에게 일본은 벤치마킹의 전형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일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삼성 기술인력들은 김포공항발 오사카행 비행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 역시 주요한 정책은 이른바 ‘도쿄구상’에서 결정했다.

 호암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믿음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란 말도 자주 썼다. 사람을 의심하면 쓰지 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명심보감을 기업경영에 실천한 것이다. 인재와 기술을 중요시한 호암의 경영관은 2010년 세계 최대 전자업체에 등극한 오늘날 삼성전자에 그대로 전해졌다.

 김원석기자 stone201@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