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제·문화·환경 전반에 걸쳐 이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IT)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과학기술 정책 연구가 더 이상 기술 자체에만 머무를 수 없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지난 2008년 천군만마를 얻었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정치·경제·행정·과학기술 분야를 두루 섭렵한 김석준 원장은 다방면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STEPI의 환골탈태에 힘을 쏟았다.
적지 않은 과학기술 정책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뚜렷한 정체성이 부족했던 STEPI가 이제 개방형 기술혁신 패러다임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국책연구기관으로 급부상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는 STEPI에도 남다른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한국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세계 각국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STEPI가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 우리나라의 지위 향상과 국제 공조체제 구축을 위해 적지 않은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G20을 겨냥한 STEPI의 올해 사업 계획으로 말문을 열었다.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STEPI가 국제 과학기술 협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올해 핵심 사업으로 내세우셨습니다. 어떤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시는지요.
▲지난해 G20에서 제안할 정책 어젠다를 발굴하기 위해 구성한 연구팀에서 구상하는 것은 ‘G20 서울 이니셔티브’입니다. 그동안 국제통화기금(IMF)이 선진국 위주의 국제 금융질서를 주도해왔다면 이번에 서울에서는 여기에 녹색·지속성장 등 새로운 이슈를 추가함으로써 한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서울 이니셔티브의 3대 세부과제로 세계 녹색질서 재편을 위한 ‘서울 선언문’을 채택하고 개도국의 녹색지식 네트워크 구축을 지원하는 일명 ‘월드그린펀드(WGF)’ 창설도 제안할 생각입니다.
최근 한·중·일·인도·호주 5개국을 초청해 STEPI가 개최한 ‘사이언스리더포럼’에 참석했던 각국 과학기술정책기관의 수장과 ‘G20 과학기술정책기관장 회의’를 제안했습니다.
가능하면 G20에 앞서 10월쯤 회의를 열어 과학기술 분야 공동 문제를 논의하고 건의문을 만들어 정상회담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국제 공조 외에 남북한의 과학기술 협력 사업에도 평소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글로컬(global+local)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남북 과기 협력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왔는데 올 하반기에는 남북 공동 과학기술 협력 행사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과기 분야의 남북 협력은 북한 측에서도 원합니다. 과기 분야는 탈이념적, 탈정치적이어서 비교적 협력이 용이한 만큼 이를 통일로 연결하는 가교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북한의 지도층이나 엘리트층 인재들이 IT 분야에 다수 종사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고급 인력이 공동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건축 설계,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서 상호 협력한다면 금강산·개성공단보다 한 단계 격상된 남북 경협이 가능해집니다.
올해 STEPI는 외부 행사 개최 외에도 이러한 남북 과기 협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 제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STEPI는 특정 부처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부처의 과학기술 정책을 아우르면서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의 부재 대안으로 주목받으셨는데요.
▲과기부가 없어진 후 과학기술 분야를 총체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부족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과기 전체를 포괄하는 커뮤니티의 중심이나 합의(컨센서스)를 모아가는 역할을 하는 주체가 모호해졌습니다. 국책기관이 여럿 있지만 국가적 관심사나 장기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공동의 관심사를 발굴하기보다 그때그때 단기적 사고로 대응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과거 과기부의 과학기술혁신본부가 비슷한 시도를 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못 얻었습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는 태생적으로 위원회라는 성격상 이슈를 이끌기에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원장 취임 이후 이런 역할을 STEPI가 해보자는 포부를 품게 됐습니다.
STEPI를 ‘글로벌 싱크탱크’로 명명하고 다양한 방면을 포괄하는 정책 연구에 초점을 맞춘 결과 눈에 띄는 성과도 다수 배출했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에 과학비즈니스벨트가 포함되면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휘말렸다는 안팎의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정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를 어떻게 원만하게 추진해나가야 할지 조언해주십시오.
▲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은 예산 규모만 최소 3조5000억원으로 국가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프로젝트입니다.
대덕단지는 지난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첨단 과학에 대한 애정으로 탄생했지만 불행히도 R&D에만 집중하고 비즈니스로 연계해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요.
21세기 지식 사회에서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엔진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과학벨트 사업입니다.
현재 세종시법 수정안에 과학벨트가 포함되면서 정치적 이슈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여야 모두 과학벨트 자체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원만히 추진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정치권에서 과학벨트 이슈를 행정도시와 연계하지 말고 분리해서 다뤄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국가 경쟁력 엔진의 동력은 떨어집니다.
행정도시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하더라도 과학벨트 사업은 조속히 추진해야 합니다.
-지난해 출연연 선진화 방안과 관련해 STEPI가 기초기술연구 분야 외부 용역을 수행했습니다. 산업기술연구회가 공개한 것과 같은 큰 폭의 변화가 불가피한지 궁금합니다.
▲대전제는 연구자들이 조직 개편을 둘러싼 논란에 휘둘리지 말고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 정부는 과학기술 연구 예산을 대폭 늘렸고 연구자들의 정년 연장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그만큼 연구자들의 연구 환경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실험실의 문패가 어디로 가든 연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10년 전 행정개혁위원으로서 현 출연연 체제 구축에 참여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연구자들이 얼마나 안정되게 기존 연구 작업을 수행하는지가 핵심입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연구주제가 달라지면서 거버넌스 체제를 융통성 있게 바꿔줄 필요성은 있죠.
여기에 국내의 상황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과학단지의 동향도 주시해야 하고 국내에 구축될 과학비즈니스벨트도 고려해야 합니다.
기존 기초원천 연구 기관과 과학벨트에 들어설 기초과학연구원 간에 어떤 형태로든 협업, 조정이 불가피할 것입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