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이 닳도록
우리는 잘 살아보기 위해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다. 물질적으론 풍요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다. 부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다. 어릴 적 시골집 부뚜막을 떠올려 보자. 새까맣게 닳은 부뚜막에는 가족들에게 헌신해 온 우리 어머님의 삶이 녹아 있다. 오래되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인생 역정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저자는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보고자 했다. 그러면서 던지는 화두는 ‘문화적 자존’이다. 저자에게 문화적 자존은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잊었던 것들, 지켜야 했지만 놓치고 살아왔던 것들, 그리고 키워가야 할 소중한 것들을 49편의 글을 통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여행담이나 어린 시절 기억 같은 신변의 얘기부터 국내외 주요 사건이나 세계사적인 일들까지 다양하게 넘나든다. 이 각각의 글들을 모두 관통하는 주제들이 있다. 바로 문화적 자존과 ‘현장성’ ‘개별성’ ‘자연’이라는 네 가지 테마요, 이들은 마치 부뚜막처럼 너무도 우리 가까이에 존재한다. 저자에게 문화적 자존은 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있는 파랑새다. 산업 근대화가 경제적 자존을 얻게 했듯, 문화적 자존은 문화적 근대성을 통해 그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존적 가치를 굳건하게 세우며 실천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또한 현장성은 마치 생명의 씨앗과 같은 대단한 힘을 지닌 가치다. 갈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더 느끼게 되는 요즘 세태에서 현장성은 끊임없이 그 둘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미약하지만 소중한 개별적 가치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모여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개별성이다. 개별적 내력에 바탕을 둔 사회적 관계야말로 온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사실 잡초란 말도 어찌 보면 틀렸다. 자연에는 불필요한 존재가 없다는 섭리를 이 책은 다시 한번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덕희 지음, 이앤비플러스 펴냄, 1만2000원.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