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 전이다. 반도체 장비업체 ‘주성엔지니어링’과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아무튼, 새로운 장비를 만들었다고 해 담당자를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국내 처음으로 반도체 증착에 사용하는 전공정(前工程) 장비를 개발했다는 주장에 아무리 ‘벤처’라지만 황당했다. 클린룸 하나 없는 허름한 아파트형 공장에서, 그것도 반도체 전공정용 핵심 장비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990년대, 반도체 핵심장비는 당연히 외국기업 몫이었다. 국산 장비는 끼일 여지조차 없는 게 불문율이고 상식이었다. 당시, 반도체 경력 2년차이던 내 상식으로 최소한 그랬다.
그러나 주성엔지니어링이 만든 장비가 대기업의 벽을 넘어 세계 시장까지 진출하면서 나의 얕은 상식은 여지없이 깨졌다. 그들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열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사옥도 생겼고 매출과 직원은 수백 배로 늘었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이 회사 황철주 사장의 모습과 말투는 예전 그대로다. 언제나 수줍은 표정으로 무슨 질문을 해도 “세계 정상(TOP)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게 황사장의 일관된 답변이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눈빛으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새 공장에 입주했을 때도 똑같다. 15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이 처음엔 답답했는데, 지금은 무섭다.
이런 황사장이 우리나라 벤처기업 문화를 이끌어갈 벤처협회장이 됐다. “10년 후 우리 경제를 벤처가 책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게 그의 취임 일성이다. ‘왜 대기업이 아닌 벤처냐.’ 라는 질문에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을 기반으로 열정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벤처다” 라고 말했다. 세계로 눈을 돌리고 누구도 만들지 않는 ‘창조적 명품’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나라 벤처를 둘러싼 문화 자체를 바꾸겠다는 포부다.
세상사엔 한번 굳어진 선입견과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과거 수많은 벤처 사업가들이 실패로 인해 신용불량자, 심지어 노숙자로 전락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새로운 도전과 창업의 꿈을 버린 지 오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라’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아직도 벤처 타령이냐’는 비아냥도 각오해야 한다. 벤처기업 하나를 일궈내는 작업과 비교도 안 될 또 다른 고통이 따를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숨죽이며 사망선고만 기다리는 한국 벤처산업의 혼(魂)을 다시 깨우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도 ‘창조와 도전’, 그리고 ‘벤처’가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 사실에 반신반의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세계 1위는 당연히 대기업이나 외국업체의 몫이다. 우리나라 중소 벤처기업은 끼일 여지조차 없는 게 불문율이고 상식이다. 이제 웬만큼 사회 경험을 쌓은 내 상식으로는 최소한 그렇다. 이런 얕은 상식과 선입견을 다시 한번 무너뜨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