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무력에 의한 점유나 정치권력 확보에 의한 강압을 역사 속의 승리라고 보는 시각인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멀게는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 백제의 역사서가 상대적으로 부실했고, 가깝게는 독재 미화와 우익편향을 객관적 진리마냥 공인해온 1980∼1990년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들이 있지 않던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같은 우스개가 단순한 개그 이상으로 현 시대 최고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처럼 자리 잡은 상황이다.
승리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식의 역사를 기록할 수도 있다. 그저 당대의 권력 획득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도 어떤 갈망을 지니고 계속 살아남아 움직이는 것이 승리라면 어떨까. 결정적 발화점이자 기폭제에 집중하는 역사가 아니라 그 기저에 있는 커다란 연료통에 주목하는 시각이다. 사회 엘리트들의 활극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역사적 변화의 바탕이 되어온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 및 그들의 갈망을 그려내는 역사다.
지속적으로 살아남는 것을 기준으로 치자면, 잠시 왔다가 가는 권력자들과 달리 평범한 민중은 항상 승리자다. 물론 반대급부로 세상은 오로지 민중들의 힘으로만 움직였다는 식으로 과장하면 그것 나름대로 민망하고 무의미한 서술이 되겠지만, 권력에서 시작되는 전쟁이나 차별, 억압 등 여러 횡포에 평범한 사람들이 대처하며 지금까지 끈질기게 사회를 이어온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매우 유용한 접근이다.
최근 타계한 미국의 진보성향 역사학자이자 한 시대를 대표한 실천적 지성 하워드 진의 명저 ‘미국 민중사’는 한국에 출시되며 장사에 방해되는 어떤 특정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민중’을 빼고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원작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만화판은 그보다 더 간편하게 추려낸 버전이다. 만화적 재미 측면은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유감스럽게도 만화판을 그려낸 마이크 코노패키는 래리 고닉 같은 천재가 아니다), 원작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 훌륭하며 원작 출간 후 십수년간 진행된 여러 부조리에 대한 추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작품은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역사적 사건과 흐름 속에서, 권력자들의 결정 부분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생활조건과 의지, 힘들이 모여서 움직임을 만든 부분들을 발굴해내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학살, 노동운동 탄압, 흑인차별 등 당시에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했지만 역사에서는 애써 가려두곤 했던 부분들을 발굴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상황을 개선해 나갔는지가 펼쳐진다.
그것은 계급 대립 속에 공산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작위성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세를 간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인간적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이뤄진다. 시민들이 그저 투표하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하나의 의지가 되어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는 학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역사라는 것이 오늘을 살기 위한 교훈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야말로, 결국 역사적 위인이 아닌 나라도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효능감이다. 거대한 권력 활극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승자들의 역사를 읽어내고, 지금 자기 자신이 또 다른 승자의 역사를 계속 만들어 나아갈 에너지를 얻어낼 필요가 있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capcolds@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