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를 막을 구원투수로 원자력 에너지가 급부상하고 있다. 그동안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불필요한 전등이나 보일러를 끄며 거대한 바람개비로 전기를 만드는 노력을 해왔지만 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리기엔 솔직히 역부족이었다. 원전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고 저렴한 형태로 진화한다면 원자력은 탄소배출을 줄이고 지구촌의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킬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지금은 에너지 감축을 위한 논의보다 에너지 기적(에너지 미러클)에 대한 투자가 시급한 시기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지난달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열린 테드(TED) 콘퍼런스에서 핵폐기물로 지구의 미래를 구하겠다는 웅대한 비전을 밝혔다.
그는 지구온난화 속도를 늦출 새로운 청정에너지원으로 원자력 발전과정에서 나온 핵연료 찌꺼기를 재활용하는 혁신적 원전기술을 소개했다. MS를 떠난 뒤 빌 게이츠는 막대한 자산을 말라리아 퇴치에 쏟아붓더니 이번에는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신형 원전 건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매년 유명연사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테드 콘퍼런스에서 빌 게이츠의 강연은 단연 돋보였다. 인류가 지구온난화로 생길 파국을 막으려면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이를 달성하려면 각국 정부는 혁신적 에너지 기술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빌 게이츠가 자신만만하게 지구를 구할 대안으로 원자력 르네상스를 제안한 배경은 무엇일까. 방사능 유출 위험과 핵폐기물 문제를 안겨주던 원자력 발전이 2020년에는 눈부신 기술 발전에 힘입어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변신할 것이란 자신감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30년간 핵폐기물을 비롯한 환경문제를 이유로 자국 내 원전 설립을 중단해왔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조지아주에 새 원전을 건설하는 데 총 83억달러의 예산을 지원한다고 밝혀 원전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이런 변화의 물결 뒤에는 고유가, 친환경 바람을 타고 차세대 원전기술이 등장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자리잡고 있다. 에너지 기적에 대한 빌 게이츠의 확신과 자신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가 소유한 미국 시애틀의 테라파워(TerraPower)란 벤처기업은 기존 원전을 가동할 때 나오는 우라늄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원자로기술(TWR:Travelling Wave Reactor, 진행파 원자로)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갖고 있다. 진행파 원자로의 실용화 가능성에 대해서 내로라하는 원자력 전문가들도 엇갈린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도 있다. 골치 아픈 핵폐기물을 연료로 쓰는 차세대 원전기술이 실용화되면 인류가 당면한 지구 온난화와 에너지 문제 해결에 커다란 돌파구가 열린다는 점이다.
◇진행파 원자로란 무엇인가=국내에서 가동 중인 경수로는 우라늄 광석의 0.7%에 불과한 농축우라늄(U235)만 핵연료로 쓰고 나머지 99.3%를 차지하는 열화우라늄(U238)은 버린다. 우라늄광석을 사과에 비유하자면 씨만 먹고 나머지 먹음직스러운 과육을 몽땅 쓰레기통에 버리는 셈이다. 반면에 진행파 원자로는 농축우라늄을 만들 때 폐기물로 나오는 다량의 열화우라늄까지 모두 연료로 활용해 서서히 핵분열 반응을 유도한다. 사과의 씨와 과육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뜰히 발라먹는 모습과 유사하다.
완벽한 핵연료 재활용 시스템을 갖춘 덕분에 진행파 원자로는 핵연료의 교체없이도 모든 우라늄이 소진될 때까지 수십년간 가동이 가능하다. 기존 원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열화우라늄 재고만 활용해도 수백년, 지구에 풍부하게 매장된 우라늄 매장량까지 계산하면 인류는 수천년간 전력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다. 암울하던 지구촌의 중장기 에너지 수급 전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진행파 원자로의 구조적 장점은 매우 많다. 워낙 철저하게 핵연료를 연소시키기 때문에 처음부터 별도 재처리시설과 핵폐기물 저장시설이 필요없다. 원전을 가동하면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순도 우라늄을 농축하는 것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진행파 원자로는 핵폐기물을 모두 태우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최장 200년, 실제 운행 시는 60년 동안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게 조절할 수 있다. 기존 경수로는 보통 18개월이면 핵연료를 모두 소진하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기존 경수로가 하루 여러 번 연탄불을 갈아야 하는 연탄난방이라면 진행파 원자로는 최신 가스보일러에 비유할 수 있다. 핵분열이 서서히 진행되므로 진행파 원자로는 갑자기 과열되거나 폭발하는 최악의 원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든다.
진행파 원자로는 지난 1990년대부터 이론적 연구가 본격화됐다. 대부분 원자력 공학자들은 스스로 핵연료를 증식시키고 태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꿈의 원자로를 아무리 써도 재물이 줄지 않는 보물단지인 ‘화수분’처럼 황당한 아이디어로 간주했지만 요즘에는 긍정적 평가가 크게 늘고 있다. 미국 MIT가 발행하는 테크놀로지 리뷰는 지난해 1월호에서 10대 유망기술로 진행파 원자로를 선정하고 테라파워는 실용적 디자인을 개발해낸 유일한 회사라고 소개했다.
◇원자력 르네상스의 미래=존 길렌란드 테라파워 CEO는 원자로의 물리적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연료 재보급이 필요없는 진행파 원자력발전소의 데모운영은 10년 뒤, 실제 상용운전에 들어가는 시점을 오는 2025년쯤으로 잡고 있다. 현 단계에서 가장 야심적인 에너지 기술인 인공태양을 이용한 핵융합 발전소의 실용화 예상시점인 2045년과 비교하면 진행파 원자로의 상용화 일정이 20년은 이른 셈이다.
이러한 차세대 원전기술 개발에는 발달된 정보통신 기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폭적 후원으로 테라파워는 복잡한 원자로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에 기존 PC보다 1000배나 강력한 128대의 고성능 서버를 아낌없이 투입하고 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나라도 폐핵연료의 재활용을 위해 소듐 고속로와 건식 재처리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기존 원전보다 핵연료 효율이 60배에 달해 꿈의 원자로라 불리는 한국형 액체금속로(KALIMER)를 2030년께 건설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진행파 원자로와 같은 차세대 원전기술이 실용화됨에 따라 원전산업이 핵무기 확산과 환경위험, 천문학적인 공사비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 같은 핵연료 재활용 기술의 상용화 전망이 밝아지면서 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커지고 있다. 그 파급효과는 엄청나다. 저렴하고 운영하기 편리한 차세대 원전이 곳곳에 생겨나면서 기존 화력발전의 절반 가격으로 지구촌에 전기를 풍족하게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탄소 배출은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대도시의 공기질도 훨씬 개선될 것이다. 24시간 가동되는 원전의 특성은 친환경 전기차와 찰떡궁합이다. 전국 수백만대의 전기차를 한꺼번에 재충전하는 인프라를 갖추려면 유휴전력이 야간시간대에 집중되는 원자력 발전이 가장 유력한 대안이다. 친환경 자동차 산업은 원전 보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차세대 원전 도입이 지구 온난화 문제의 가장 효율적 대책이란 원전 옹호론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언제 실용화될지도 모를 원전기술에 대한 기대심리가 지금 시급한 환경문제 해결을 태만히 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빌 게이츠는 테드 콘퍼런스에서 핵연료 재활용 외에도 태양광, 풍력, 탄소포집 등 혁신적 에너지 기술에 각국 정부가 과감한 투자를 하자고 촉구했다. 또 관객들 앞에서 유리병에 잡아온 반딧불이를 날리면서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 친환경 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평생 모은 재산으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든 빌 게이츠의 행보에선 분명한 진정성이 읽혀졌다.
보다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차세대 원전기술에 대한 작금의 기대가 녹색거품이나 환상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지만 현 단계에서 녹색성장의 성공여부는 원전 르네상스 시대가 제 때 열리는지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