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시(詩)와 만남을 시도한 특별한 만화 한 편을 소개해보자 한다. 시와 만남을 시도했고, 작가가 여자고, 더 나아가 주인공이 대부분 여성이라면 흔히들 쉽게 만날 수 있는 말랑말랑한 로맨스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섣부른 기대나 판단은 금물. 요즘 시대에 쉽게 볼 수 없는 우리네 진짜 일상이 시를 타고, 만화의 칸칸에 스며들어 책장 속에서 그 속내를 드러낸다.
제목처럼 만화 ‘그녀의 완벽한 하루’는 여자 주인공들의 하루를 단편으로 그려내고 있다. 희정, 윤정, 지은, 미영, 수현. 누군가의 친구거나 선배 혹은 가족일 법한 흔한 이름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오래된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그저 섹스만 남아 있을 뿐이고, 돈이 없어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는 일은 힘에 부친다. 이미 사랑은 사라진 결혼생활에서 생겨버린 아기에 대한 고민으로 매일 밤을 새우기도 하고, 프리랜서라는 직업이지만 매월 월세를 내기에도 벅차고, 백화점에서 하루 종일 서서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며 판매를 하는 일상도 버겁다. 이러한 그녀들의 일상의 한 장면을 한 편의 단편 영화처럼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그녀들의 삶이 더욱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만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시다. 기형도·박정만·허연·오규원·최영미·최승자·이상·황지우·신현림 등의 시 속에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매 편의 이야기들에 힘을 실어 준다. 시가 주는 여운이 만화 속에서의 칸과 칸이 주는 여운과 만나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가 이토록 울림을 주었던가. 이 만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시를 읽는 법을 배운 기분까지 든다.
전체 단행본은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각의 주인공들은 서로 이웃으로, 형제로, 때론 손님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다. 내가 사는 삶이, 혹은 내가 어제 스치고 지나갔던 낯선 이웃의 삶이 충분히 그려져 있다는 느낌을 책장을 넘기면서 아련히 받게 된다.
수많은 패션 관련 TV 프로그램에서는 나의 옷장 속에 유명 디자이너 옷이 있지 않으면 현대인이 아니라고 비웃기도 하고, 골드 미스나 스키니맘 따위의 신조어를 소개하며 모든 여성들이 자신에게 몇 십만원씩을 투자하며 본인의 삶을 가꾸는 데 열성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을 한다.
하지만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오면 모든 것은 제자리다. 나의 옷장 속에는 여전히 이름 모를 브랜드의 옷으로 가득 차 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그저 이름 없이 살아가는 한 여성일 뿐이다. 이러한 일상의 허망함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을 이 만화에서는 정면으로 가감없이 그리고 있다. 묵직한 펜으로 그려진 그림은 보너스다.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나의 삶속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을 때, 혹은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이는 때” 꼭 한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비록 책 속에서 그려지는 삶이 밝지만은 않아도 그래도 살아나가는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를 통해 나의 삶이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백수진 한국만화영상산업진흥원 만화규장각 콘텐츠 기획담당 bride100@par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