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장악이 게임의 흐름을 결정하는 최대 변수다.”
이는 축구에만 해당되는 승리의 공식이 아니다. 향후 폭발적으로 성장할 자동차용 2차전지 시장에서도 같은 공식이 적용될 전망이다.
국내 전기차용 2차전지 시장은 삼성SDI·LG화학 등 대기업이 패키징부문을 중심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2차전지의 최종 기술인 제조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부품 소재와 원천기술에서는 세계 최강국인 일본의 각각 50%와 30% 수준에 불과하다.
출발도 늦었고, 기초 분야에 소홀했던 과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산업의 허리를 책임지는 중소·중견기업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국내 중소 2차전지 업계는 전기차 시장에서는 상용차와 전기 자전거 등 틈새시장을 중심으로 세를 빠르게 넓히고 있다. 일부 기업은 국내외 대기업을 제치고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에 직접 제품을 납품하는가 하면 글로벌 기업과 손잡고 시장개척에 나서고 있다. 소재 업체 역시 연구개발(R&D)을 통해 특허와 기술력을 축적하고 있다.
◇중소업체들 해외에서 잇따른 공급 계약=대기업에 못지않게 중소기업도 2차전지 시장에서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소형전지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해 시장을 주도하는가 하면 전기차분야에선 글로벌 기업과의 합작사 설립도 이어지고 있다.
이랜텍, 이아이지(EIG), 코캄 등이 대표적이다.
이랜텍(대표 이세용)은 노트북 PC·휴대폰 등에 사용되는 소형전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삼성SDI에 제품을 주로 납품하고 있지만 2차전지 분야에서 기술력이 뛰어나 향후 전기차 등 중대형 시장 진출도 기대된다. 이랜텍은 특히 지난해 매출 2475억원으로 전년 대비 24%에 달하는 신장률을 기록했다. 중소업체 가운데는 가장 큰 매출액을 기록 중이다. 올해도 휴대폰 분야에서는 스마트폰의 활성화와 노트북PC의 꾸준한 성장으로 큰 폭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삼성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삼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해 교육을 할 만큼 기술력을 갖췄다.
중대형 리튬전지 제조사 EIG(대표 강석범)는 지난해 인도 최대 자동차 회사 타타모터스로부터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타타모터스가 생산하는 전기차 ‘인디카 비스타 EV’에 리튬이온 폴리머 전지를 양산 공급해줄 것을 제안 받은 것. 우선 올해 4월까지 상용차 375대 분량이지만 2012년까지 5555대 규모로 늘리는 조건이다. 타타모터스는 지난해 2월부터 8개월간 EIG의 리튬이온 폴리머 전지에 대한 성능 시험과 안전성 시험을 진행했으며, 시험 결과 타타모터스에서 선정한 최상위 등급인 ‘그린’ 등급을 받음으로 해서 최종 계약까지 성사됐다. EIG는 현재 천안의 배터리 생산 공장을 연 8만셀 생산규모에서 연 100만셀 생산규모로 증설 중이다.
코캄(대표 황인범)은 지난해 7월 전기차용 전지사업을 위해 다우케미컬과 합작으로 미국에서 ‘다우코캄’이란 법인을 설립했다. 코캄이 2차전지 제조기술을 제공하고 다우케미칼이 자본을 댄 회사다.
이를 통해 다우코캄은 미국 미시간주 미들랜드에 2011년 초부터 연간 1.2GW 약 6만대의 전기차, 하이브리드카에 들어갈 전지를 생산한다. 이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휴대폰용 전지 전체 용량에 근접하는 규모다. 단일공장으로 세계 최대의 리튬전지 생산능력을 갖춘 셈이다.
다우코캄은 이미 포드와 전기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추진 중으로 지난해 8월에는 미국 정부가 발표한 총 24억달러 규모의 차세대 전지 지원금을 받았다. 29개 기업 중에서 세 번째로 많은 1억6100만달러를 수령했다. 이와 별도로 다우코캄은 지난해 초 미시간 주정부로부터 1억4500만달러의 세금감면 혜택도 약속받았다.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10여년 노력이 얻은 결실= 타타모터스는 상용 버스 부문 세계 2위, 상용 트럭 부문 세계 4위의 자동차 생산업체다. 올해 3월 소형승용차 나노를 출시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국내 자동차 업체로는 타타대우상용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영국 럭셔리 브랜드 재규어, 랜드로버를 인수하기도 한 거대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국내에서 조차 이름이 생소하고 매출도 미미한 소형 업체에 이 같은 계약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과는 그간 이들 업체들이 이뤄온 땀이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EIG는 휴대폰과 2차전지 제조업체인 VK모바일에서 시작된 회사다.
EIG의 강석범 대표와 임직원들은 지난 2006년 VK가 부도를 내면서 전지사업부가 폐쇄된 후 직원들은 동일고무벨트의 투자를 받아 설립했다. 작년까지 실적은 미미했지만, 과거 VK에서의 전지 기술과 특허를 인정받아 지식경제부가 주관하는 전기차 개발사업(PHEV20)에 현대자동차, LG화학, SB리모티브와 더불어 중소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VK 시절부터 월급조차 제대로 못 받고 연구한 보람이 서서히 결실을 보고 있다”며 “타타뿐 아니라 다양한 전기차에 국내 기술이 탑재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코캄 역시 지난 2004년부터 전기자동차에 탑재되는 대용량 리튬배터리와 생산장비를 가장 앞서 국산화해왔다. 친환경 바람을 타고 전기차용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코캄의 특화된 기술력이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또 국방분야에서도 BMS 기능을 갖춘 휴대 무선장비를 납품하는 결실을 거뒀다.
◇기술력·영세성 탈피는 숙제=하지만 이러한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지분이 많이 넘어간 것은 2차전지 업계로서는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최근 몇 년간 중소제조업체의 주인이 미국 기업으로 대거 바뀌었다. 코캄은 2008년 10월 미국의 타운센드어드밴스트에너지가 이 회사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48%의 지분을 확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에너랜드 역시 2008년 1월 미국의 A123시스템스가 최대주주가 됐다.
지난 2001년 새한 전지사업부에서 분사한 에너테크도 미국 최대의 전기차 배터리 회사인 에너원에 팔리며 에너테크인터내셔널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반 기술을 갖춘 기업이 경쟁국인 미국이나 일본 등에 넘어가면서 그만큼 국내 기술력 고갈이 우려되는 사항이다.
주요 핵심기술을 해외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도 문제다.
2차전지의 핵심소재 가운데 하나인 양극소재를 예로 들면, 미국의 아르곤기술연구소와 3M, 일본의 다나카화학 등이 특허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놓여있는 게 현실이다.
또 종업원 300명 이상, 매출 1000억원 이상 기업이 두세 곳에 불과하고 자본과 기술이 영세한 기업이 많은 점도 2차전지 업계가 넘어서야할 큰 고개다. 2차전지 제조업 역시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한 2차전지 업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국내 중소기업의 경우 규모가 작고 영세한데다 차별화된 기술력에서는 일본에 뒤지고 가격경쟁력에서 중국에 추격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라며 “새로운 소재 개발·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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