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사회는 인간의 특성인 망각을 좀처럼 용인하지 않는다. 이미 삶의 한 장면, 한 순간을 디지털 신호로 쪼개 어디엔가 저장하고 불러내는 기술은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머지않아 평범한 우리의 일상은 홈페이지 속의 작은 사진이 아니라 선명한 HD 동영상, 홀로그램 파일로 저장돼 디지털 세상에서 불멸의 영생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는 그야말로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이 기억되는 ‘토털 리콜’(total recall)의 시대다.
“그래, 초등학교 졸업식 때 근처 중국식당에 가서 양껏 먹었는데.” “대학 때 두 번째 미팅한 여자가 술먹고 나한테 이런 식으로 욕을 했었지.”
오래된 개인의 기억을 되살리는 도구는 주로 과거의 일기장이나 사진첩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블로그, SNS,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노트북PC 등 다양한 기술에 힘 입어 잊었던 아련한 기억의 재생이 점점 더 생생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질적, 양적 확대는 프라이버시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인 홈페이지는 그나마 보여주고 싶은 사생활만 공개하지만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기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도로와 골목마다 설치된 CCTV에 하루종일 기록되는 동영상, 차량용 영상 블랙박스에 저장된 아찔한 사고 순간. 아날로그 시대에 이러한 경험들은 문서, 사진, 검색이 곤란한 VCR테이프 등에 처박혀 어딘가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저장방식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아련한 추억 속의 평범한 일상도 생생한 재구성이 가능해지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는 방대한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커다란 캐비닛, 창고 시설이 끝없이 요구됐기에 일정시간이 흐르면 자발적 폐기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같은 가격의 HDD가 매년 두 배씩 저장용량이 커지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저장매체의 터무니없는 저장용량 확대는 별 시시콜콜한 기억까지 좀처럼 폐기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IT업계에선 이러한 일상의 모든 정보를 쓸어 담아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다면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2002년부터 개인의 모든 삶의 족적과 흔적을 디지털화해 저장하는 마이 라이프 비츠(My Life Bit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 고든 벨 수석연구원은 잠자는 시간이 아니면 항상 두 대의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닌다. 그는 그 중의 하나를 센스 캠(Sense Cam)이라고 부른다. 센스 캠은 매년 하루도 빠짐 없이 하루 종일 20초마다 디지털 사진을 찍는다. 나머지 카메라 하나는 벨이 오른쪽 버튼를 누를 때만 영상을 찍는다.
벨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직접 저술한 책 토털 리콜(한국명 ‘디지털 혁명의 미래’)의 공식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이 라이프 비츠는 기사·책·편지·메모·사진·프레젠테이션·음악·가정용 영화와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된 강의 등 일상생활을 포착해서 보존한다.”
고든의 기록에는 전화 호출, IM스크립트, 여러 해 동안의 e메일, 방문한 웹 페이지와 센스캠이 포착한 일상적인 활동이 포함돼 있다. 삶의 모든 것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깅(Lifelogging)이 바로 이 프로젝트의 본질인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어려움은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골라내는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라이프로깅은 디지털 정보의 저장과 관리가 너무나 편리해지고 비용이 혁신적으로 낮아져 가능해졌다.
수백TB급의 개인정보 저장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지금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20∼30년 전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공간에 저장할 만한 정보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설사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해도 축적된 정보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는 건 더 힘들었다. 1970년대엔 제대로 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만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보 하나를 찾는 데도 LP판만 한 레코드 테이프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웹으로 개인용 PC에서 간편하게 DB를 구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글·빙(Bing)·울프램알파 등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검색엔진도 많다. 여기에 최근 클라우드 컴퓨팅의 발전은 라이프로깅을 더욱 쉽게 하고 있다. 정보를 마음껏 생산해 클라우드 저편 어딘가에 저장해 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디바이스를 통해서든 원할 때 그 기억을 꺼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토털 리콜은 왜 하게 되는 것일까. 누구도 아직 완전한 토털 리콜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그 유용성이 상당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식중독에 걸린 환자가 의사에게 지난 한 주간 먹은 음식을 한 번에 모두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잘못된 점프 습관을 고치려 할 때 언제, 어떤 경기에서, 어떤 상황에서 잘못된 습관을 보여왔는지 한꺼번에 패턴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이겠는가.
교육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연구, 학문과 같이 완전히 공유될 수 있는 모두의 기억, 모두의 정보가 토털 리콜로 공유된다면 논문을 쓸 때 더 이상 참고문헌을 찾으러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연구 주제에 더욱 빠르게,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토털 리콜의 시대는 정보를 활용하는 개인의 방식도 바꾸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정보를 ‘저장’하고 되살리는 데 인간이 가진 정력의 상당 부분을 사용했다면 미래엔 그보다 정보의 조합·결합·조합·사고 등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인간 능력의 상당 부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정보나 기억은 언제 어디서건 즉시 ‘리콜’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인터넷의 선구자이자 구글 부사장인 빈트 서프가 ‘스마트폰 같은 개인 장치의 발달이 사고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문자의 발명이나 계산기의 발명이 인간을 더 바보로 만든 것은 아니다”고 대답한 것도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세상 만사가 그렇듯 토털 리콜의 시대가 마냥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일단 디지털로 저장된 정보의 안정성 문제다.
빈트 서프는 역시 디지털 정보에 대해 항상 “연약하다(fragile)”고 강조한다. 잘 보관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특정 데이터 포맷을 읽는 방법이 유실되면 데이터가 아무리 많이 쌓여도 무용지물이다. 특히 그 정보가 클라우드 형태로 담겨 있을 때 관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실제로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S3가 2008년 7월 약 6시간 동안 멈추면서 아마존에 의지하는 수많은 인터넷 서비스가 먹통이 된 때가 있었다. 다행히 큰 동요 없이 해결됐지만 인간이 운영하는 클라우드 형태의 정보DB는 안정성에서 그리 믿을 만하지 못다는 걸 보여준 사례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토털 리콜을 할 수 있기는 하더라도 사람들이 과연 실제로 그것을 원하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설사 나쁜 기억, 위법행위일 경우라도 보관하기를 원할 것인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을까. 그 선택권은 반드시 인간이 가져야 한다.
이와 함께 저장된 정보를 어디까지 기억할 것인가. 그것을 누구에게까지,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의 문제도 있다. 최근 도요타가 자동차 블랙박스인 전자식 기록장치(EDR)의 주행기록을 미국 정부에 제공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논란처럼 정보를 저장하는 수위와 그것에 대한 활용과 공개 수위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모두의 기억, 모든 정보를 마음대로 보고 원하는 대로 정보를 다루는 조지 오웰의 ‘빅 브러더’는 누구도 원치 않는다. 이에 대한 기술적 해결책은 훌륭한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 묻어둘 필요가 있는 기억과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구분하고, 네트워크를 돌아다니면서 유효기간이 지난 쓸데 없는 정보를 알아서 지우는 기술은 인간의 평온한 일상을 돕기 위한 꼭 필요한 도구일 수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집 안에 잡다한 물건과 쓰레기를 쌓아두기보다는 가끔씩 청소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