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세상]공간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만화로 보는 세상]공간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일본의 가마쿠라 하면 뭐가 떠오를까.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가마쿠라 막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일본 만화 팬이라면? 당연히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가 떠올라야 한다.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6년 동안 일본 만화잡지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일본에서만 1억부가 넘게 팔린 슈퍼 베스트셀러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주장 채치수를 비롯해 돌아온 중학 MVP 정대만, 근성의 가드 송태섭, 부주장 권준호 그리고 두 명의 루키 강백호와 서태웅 등이 등장한다. 그들이 땀흘렸던 고등학교, 지역예선이 열리던 체육관,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길, 바닷가를 달리던 전차까지 모두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에 실재한다.

 최근 출간된 몇 권의 만화가 공교롭게 가마쿠라가 배경이다. 요시다 아키미의 ‘바닷마을 다이어리1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바닷마을 다이어리2 한낮에 뜬 달’, 그리고 시무라 다카코의 ‘푸른 꽃’의 배경이 가마쿠라다.

 푸른 꽃을 보면, 작품 첫머리에 여고에 새롭게 들어간 주인공이 바닷가를 보며 달리는 노면전차 에노덴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우연히 10년 전 단짝을 만나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정과 사랑을 넘나드는 소녀들의 미묘한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묘사한 만화는 가마쿠라시의 언덕길과 에노덴 전차, 가마쿠라 역과 같은 구체적 배경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요시다 아키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고다네 세 자매는 집을 나간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는 연락을 받는다. 아버지 새 부인의 삼촌되는 사람에게서 온 연락. 둘째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여자가 생겨 집을 나갔다. 그리고 2년 후 엄마도 남자가 생겨 집을 나갔다. 세 자매는 할머니와 함께 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 고민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간 세 자매는 그곳에서 이복자매 아사노 스즈를 만난다.

 중학생인 아사노 스즈는 어머니가 죽은 후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와 새엄마와 살고 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것.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세 자매는 스즈와 함께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장소로 간다. 산 위에서 경치를 본 자매들은 그곳이 가마쿠라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큰 언니는 스즈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하고, 스즈는 가마쿠라에 온다.

 슬램덩크와 푸른 꽃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전혀 다른 만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다. 바다를 낀 오래된 도시 가마쿠라는 스포츠 만화, 여고생의 연애만화 그리고 네 자매의 일상적 드라마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다. 실재 공간이 있기 때문에 만화의 서사가 허구를 넘어 공간 안에서 구체화된다. 많은 일본만화들이 작품과 어울리는 장소를 헌팅하고, 사진을 찍어 작품 안에 살아있는 공간으로 배치시킨다. 그런데 한국만화는 아직 구체성이 떨어진다.

 실사 동영상을 말미에 붙인 실험을 선보인 윤태호의 ‘세티’는 다른 작품과 달리 ‘동영상’을 찍어야 되기 때문에 실재하는 공간을 헌팅했다. 내가 재직 중인 경기도 이천에 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이 세티의 배경이다. 매일 보는 공간이어서 그런지 마치 내 옆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이야기는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세티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세티의 배경이 된 청강문화산업대학에 한번쯤 와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만화는 평면에 공간이 묘사되는 매체다. 많은 이미지들이 기호화된다. 그런데 배경만큼은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구체적일수록 작가가 생각하는 공간과 독자가 느끼는 공간이 일치하기 쉽기 때문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