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 시대가 마침내 열린다. 오는 30일부터 시속 60㎞ 이하의 저속 전기차가 도심 주행이 공식 허용됨에 따라 소음, 진동, 배기가스가 없는 3無의 전기차를 개인도 직접 몰 수 있게 됐다. 오는 가을에는 중고차를 전기차로 개조하는 시장이 열린다. 마을버스, 택배차량도 전기차로 하나둘 바뀐다. 피자를 배달하던 50cc 스쿠터는 전기이륜차로 대체될 조짐이다. 완성차 업계의 신형 전기차 출시도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전기자동차는 이제 친환경 자동차시장의 조연이 아닌 주역자리를 일찌감치 예약해둔 상황이다.
세계 자동차시장에 친환경 전기차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최근 도요타 리콜사태는 친환경 자동차 시장을 주도해온 일제 하이브리드카가 예상보다 일찍 물러나고 순수 전기차가 약진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미쓰비시가 다음달 세계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인 아이미브(i-MiEV)를 일본에서 정식 판매하는 가운데 르노-닛산은 전기차 양산에 올인하면서 시장선두를 노리고 있다. 도요타는 리콜사태로 하이브리드카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커다란 상처를 입자 전기차 출시를 서두르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GM과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는 도요타가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전기차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BYD는 자사가 제조하는 니켈인산철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 ‘e6’로 전기차 경쟁에 뛰어 들었다. 국내서는 현대차가 전기 승용차 i10 EV를 생산해 오는 8월부터 수도권과 제주에서 시범운행할 예정이다. 르노삼성은 뉴SM3전기차를 2012년 부산공장에서 양산할 계획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내연기관에서 전기모터로 패러다임 변화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자동차산업의 체질 변화=기름이 아닌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차의 등장은 자동차 시장의 신차모델이 달라지는 차원을 넘어 자동차 산업의 체질을 바꿔놓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전기차가 상용화되면서 그동안 거대한 조립라인을 갖춘 대기업의 전유물로 간주되던 자동차 시장에 중소기업들이 당돌하게 도전하고 있다.
국내서는 CT&T가 최초로 시속 60㎞ 이하 저속 전기차 시판에 들어가는 가운데 AD모터스, ATTR&D, 그린카클린시티, 삼양옵틱스 등이 전기차 판매를 서두르고 있다. 레오모터스는 전기버스 및 전기승용차 개조사업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같은 움직임은 지난 1908년 포드 T모델에서 시작된 자동차 대량생산 시대가 끝나고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다품종 소량생산 전기차 시장이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열리면 수백미터의 일괄생산라인을 갖춘 대기업이 자동차 양산을 독점하던 시대가 끝난다. 이미 완성차 업체의 생산라인에서도 대량생산에 필요한 프레스 공정 및 도장공정이 크게 줄고 있다. 생산기술과 설비의 혁신에 따라서 중견기업도 충분히 자동차 제조가 가능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요즘 전기차는 부품별로 모듈화가 잘 돼 있어서 4∼5명이 조를 짜 작은 공장에서도 얼마든지 조립이 가능하다. 또한 전기차는 반드시 정형화된 엔진이나 미션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 즉 전기차 시대에는 정교한 엔진기술보다 창의적 컨셉, 개인취향에 맞출 수 있는 설계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자동차는 네 바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전혀 새로운 모습의 자동차가 나올 수도 있다. 바퀴 안에 모터가 장착된 1인승 소형 전기차를 만들어서 승강기에 올라서 실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 또 어떠한가. 전기차는 기존 자동차가 제공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동의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유망 중소기업을 전기차 스타로 키워야=한국에서 전기차 르네상스를 일으키려면 예전처럼 거대 완성차업체들의 주도적 역할에 100% 의존할 수 없다. 전기차는 본질적으로 타이어가 달린 가전제품에 가깝다. 완성차업체가 만들어 놓은 몇가지 자동차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립PC를 주문하듯이 고객이 원하는 사양에 맞춰서 공급할 수 있다. 전기차 시대에는 여러 개의 중견기업이 모듈화된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서 지역별로 산재한 자동차 조립업체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지역마다 소주회사가 있듯이 독특한 디자인과 컨셉을 지닌 전기차 회사가 전국 곳곳에 생겨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고객들은 전기차 복합상가를 둘러보면서 일제 모터와 한국산 배터리, 대만산 차체, 미제 타이어를 조립하고 나만의 색상디자인을 결합시킨 독특한 자동차를 만들지도 모른다. 거대 완성차 업체 혼자서는 이러한 시장변화에 기만하게 대응이 어렵다. 결국 한국 전기차 산업의 다양성을 위해서 주요 부품별로 경쟁력을 갖춘 유망 중소기업을 적극 키워야 한다. 현재 국내에는 세계 정상급의 전기차 부품업체들이 곳곳에 숨어 있지만 국내 자동차 산업의 폐쇄적 납품구조로 인해 빛을 못보고 외국에 헐값으로 팔려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가 수직계열화된 부품사들을 거느리는 구도에서 벗어나 유망한 다른 부품업체와 수평화된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는 현대, GM대우, 르노삼성 등 어디 계열로 분류되는 닫힌 세계이며 납품업체가 다르면 상호 제휴도 거의 없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면서 완성차업체가 독점하는 수직적 납품체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이 현재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구조개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전기차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선도하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자유롭게 경쟁하고 수평적으로 제휴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이같은 변화의 물결을 국내 자동차업계가 너무 늦지 않게 수용한다면 전기차 스타기업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한국은 21세기 자동차 강국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