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정보통신(ICT) 업종도 지구를 덥히고 자연환경을 교란하는 공해산업에 속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정보통신 분야의 전력소비는 교통과 냉난방, 제조업의 엄청난 에너지 수요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하지만 네트워크 접속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감안할 때 ICT산업의 에너지 사용량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어느새 지구환경을 해치는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인류가 쓰는 총에너지 사용량 중에서 정보통신 분야의 비중은 2% 남짓하다.
현재 ICT 산업의 전력 수요를 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하면 연간 3억톤, 도로 위의 자동차 5000만대가 내뿜는 온실가스와 맞먹는다. 교통과 물류 분야의 에너지 비중이 30%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타 산업의 에너지 수요는 크게 늘지 않는 데 비해서 정보통신 분야는 무척 탐욕스러운 에너지 먹성을 갖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당신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거나 휴대폰 통화를 할 때 피부가 느끼는 따끈한 열은 첨단 IT기기의 편리함을 누리면서 여기저기 흘리는 에너지 낭비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다.
지난 1990년대 IT혁명이 본격화한 후 하루종일 전원이 켜진 사무실 PC와 휴대폰 충전기, 인터넷 데이터센터(IDC), 이동통신 기지국, 광통신 네트워크 등에 들어가는 전력 수요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기세를 가장 많이 내는 회사는 구글이다. 전 세계 네티즌의 온갖 질문에 대응하려면 여러 개의 초대형 IDC에 서버용량을 아무리 증설해도 금세 모자라게 마련이다.
그동안 정보통신기술은 지구상의 엔트로피 증가를 억제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누군가에게 e메일 한 통을 보낼 때는 유무선 통신망에서 평균 0.4g의 탄소가 배출된다. 자동차로 먼 곳을 다녀올 때는 수백∼수천배의 탄소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친환경 자동차를 타고 출장을 떠나기보다는 e메일 또는 영상회의로 출장업무를 해결하는 것이 탄소배출을 억제하는데 최소 수백배는 더 효율적이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이 지구환경을 지킨다는 믿음은 가까운 미래에 쉽게 깨질 수 있다. 현재 텍스트 기반의 e메일에 비해 데이터 전송량이 수백배 더 많은 HD급 영상회의, 그 이상의 홀로그램 스트리밍 서비스가 집집마다 보급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향후 10년 내 수십억 인구가 고화질 동영상, 이미지, 정보를 공유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받아들이면 ICT 분야의 탄소배출량은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탄소배출량이 네트워크 접속으로 발생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에너지 효율을 끌어올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향후 10년 뒤 ICT산업은 지구환경을 지키는 천사가 아니라 거대한 탄소괴물이 될 수 있다.
◇그린터치의 출발과 파급효과=지난해 여름 통신장비회사 알카텔루슨트의 벤 베르바옌 CEO는 친환경 녹색성장에 발맞춰 ICT산업 전반의 에너지 수요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미래의 통신장비 시장은 빠른 속도보다 적은 전력을 쓰는 쪽이 이긴다는 선견지명으로 녹색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우선은 ICT 분야에서 얼마만큼 에너지 절약이 가능한지를 파악해야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알카텔루슨트 산하 벨연구소의 최고 과학자 20여명이 비밀리에 소집됐다. 그들은 복잡한 수식과 시뮬레이션 기법을 통해 기존 유무선 네트워크의 전력 수요를 어디까지 졸라맬 수 있는지 꼼꼼히 계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론상으로 기존 전력 수요의 1만분의 1(0.01%)로도 정보통신 네트워크가 거뜬히 운용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벨연구소의 연구결과가 맞다면 현재 정보통신 네트워크는 전력 수요의 99.99%를 쓸데없이 낭비해온 셈이다.
IT전문가들은 현재 정보통신 네트워크가 1만배 이상의 에너지 효율 증진 잠재력을 지녔다는 벨연구소의 주장에 과연 그게 되겠냐며 의구심을 쏟아냈다.
지난 1월 벨연구소는 내친 김에 ICT 에너지 효율 향상의 ‘현실적인 목표치’로 2015년까지 1000배를 늘리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무선통신과 유선통신, 광전송, 라우터 분야에서 아키텍처를 기초부터 새롭게 구성하고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첨단 요소기술을 투입하면 1만배는 아니라도 1000배 에너지 효율 향상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에너지 효율성의 1000배 향상은 인터넷을 포함해 전 세계 유무선 통신망을 운영하는 데 쓰는 하루치의 전력 소비량으로 3년간의 운용이 가능해지는 수준을 의미한다.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이만 한 에너지 절감목표를 달성하려면 현재 전력 수요에서 99.9%의 예비를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은 무선통신 분야에서 달성될 전망이다.
벨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이동통신 기지국을 비롯한 무선통신 인프라의 에너지 효율은 지금보다 1000만배나 향상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목표가 성공하면 e메일 한 통 보내지 못하던 수십억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풍족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미래 통신인프라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천하의 벨연구소라고 해도 지구상의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처음부터 새롭게 설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혼자서 수행하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다국적 연구개발을 위한 글로벌 컨소시엄으로 ‘그린터치(Green Touch)’가 만들어졌다. 벨연구소를 주축으로 AT&T, 차이나모바일, 텔레포니카, MIT 연구소 등 대형 통신업체와 연구소 17곳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국내서는 삼성전자종합기술원이 유일하게 참여했다.
그린터치 컨소시엄은 21세기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핵심 이슈가 될 에너지 효율성에 대한 근본적이고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벨연구소는 이러한 뜻깊은 노력에 더 많은 ICT분야 기업 및 기관들이 동참하길 요청했다.
김종훈 벨연구소 사장은 “우리는 지금 ICT를 바라보는 관점이 용량의 극대화에서 에너지 효율의 최적화로 중심이 전환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며 “그린터치 컨소시엄은 에너지 소모량 절감을 통해 미래 통신네트워크가 폭증하는 접속 수요와 환경 보호란 두 개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린터치 프로젝트가 ICT산업에 미칠 파급효과는 지대하다. 향후 5년 내에 1000배나 효율이 높은 ICT 요소기술을 시연하고 시범적인 네트워크 아키텍처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통신기술이 실용화되고 거대한 산업 수요가 창출될 전망이다. 그린터치는 이달 말까지 회원사를 받고 향후 5개년간 상세한 계획과 회원사의 역할, 지식재산권 등을 본격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다.
알카텔루슨트는 그린터치 컨소시엄으로 친환경적인 차세대 유무선 통신기술의 선두주자로서 세계시장을 다시 한 번 주름잡을 것이다. 지난 1960년대 미국이 달 탐사에 나섰던 아폴로 계획이 당시 과학계에 미친 파장처럼 그린터치의 성공은 평범한 네티즌의 라이프 패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오는 2020년대 초고속 통신망의 이용료가 눈에 띄게 저렴해지고 노트북을 오래 켜놓아도 전혀 뜨겁지 않고 히말라야 정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선명한 영상통화가 펑펑 터지면 그린터치 프로젝트의 역할이 컸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