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IT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기업은 대부분 해외 사례를 먼저 검토하곤 한다. 앞서 유사한 프로젝트를 경험한 해외기업들의 소위 ‘베스트 프랙티스’에서 교훈을 찾기 위해서다. 베스트 프랙티스 벤치마킹은 지금까지 국내기업들이 주어였고, 해외기업은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 IT 프로젝트가 해외기업들로부터 베스트 프랙티스로 인정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본 훼미리마트는 올해 초 보광훼미리파트를 방문해 차세대 점포관리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 자신들이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IT 통합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패키징업체인 앰코테크놀러지가 구축한 글로벌 제품수명주기관리(PLM) 시스템은 한국법인에서, 한국인 프로젝트매니저(PM)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세계적인 유통업체인 영국 테스코 본사는 전 세계 표준 프로세스를 한국법인에서 개발하게 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회사인 이베이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법인(이베이옥션)에만 독자적인 IT 거버넌스 체계를 인정하고 있다. 나머지 나라는 모두 미국 본사에 IT가 통합돼 있다. 세계적인 보험회사인 푸르덴셜생명 미국 본사는 한국법인이 개발한 차세대시스템용 계약관리 솔루션을 글로벌 표준시스템으로 선정했다.
이처럼 제조·금융·유통·인터넷 등 다양한 업종에서 글로벌회사 본사의 IT 책임자들이 한국법인의 베스트 프랙티스를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왜 한국의 IT 역량을 높게 평가하는 것일까.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한국형 베스트 프랙티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들의 경험과 성공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 일본 훼미리마트가 감동한 보광훼미리마트 IT 통합 프로젝트
“IT 중앙집중화로 시스템을 효율화하면 어떨까요. 모든 매장의 데이터를 한데 모아 본사와 각 매장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면 그만큼 업무 효율성도 높아질 것입니다.” 2008년 상반기였다. 박상신 보광훼미리마트 정보시스템본부장의 이야기를 들은 일본 훼미리마트 최고정보책임자(CIO)는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유통업계에서 일본은 항상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IT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본사도 나서지 않는 IT 통합을 추진하려던 박 본부장의 모습은 무모해 보일만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박 본부장은 결국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해보긴 해봤어’라는 고 정주영 회장의 한마디가 박 본부장의 도전의지를 불태웠다고 했다. 박 본부장은 “트래픽이 더 많은 국내 인터넷 쇼핑몰도 시스템 부하를 거뜬히 감당하고 있는 만큼 훼미리마트의 4700여개 편의점을 모두 통합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고 프로젝트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박 본부장은 한국의 IT 기술력과 IT 인력들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실현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보광훼미리마트는 곧바로 국내 편의점 업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통합 작업에 돌입했다. 가능한 위험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박 본부장은 프로젝트 품질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기획과 개발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을 선별해 팀을 꾸렸다. 그 결과 1년여만인 지난해 상반기에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후 약 1년간 신시스템을 운영한 결과 별다른 문제 없이 시스템은 정상 가동됐다. 이를 알게 된 일본과 대만 훼미리마트의 IT 직원들은 차세대 점포관리시스템 구축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줄지어 방한했다. 아예 2박3일간 머물며 보광훼미리마트의 차세대 점포관리시스템을 배우기도 했다.
유통IT라면 언제나 앞서 있다고 자부했던 일본 본사의 IT 담당자들은 자신들이 생각만 하던 시스템 방법론을 한발 앞서 현실화한 데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국 모든 매장의 데이터를 한군데에서 보게 되면서 점주와 본사가 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협의할 수 있게 되고, 당연히 업무 효율성도 크게 높아졌다. 그동안 아시아 각국의 훼미리마트 담당자들은 앞다퉈 이 차세대시스템 구축 노하우를 배워갔다. 이제 몇년 후면 아시아 각국의 훼미리마트 매장에 설치돼 있는 서버는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박 본부장은 “언젠가 일본에 벤치마킹을 갔을 때 핵심 프로그램의 소스를 공개 안해 카메라로 화면을 찍어온 후 거꾸로 소스를 알아내기 위해 고민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지난달에는 대만의 차세대시스템 담당자들이 그 때의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화면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뿌듯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테스코그룹 표준 SCM 모델 만드는 삼성테스코
영국 테스코그룹은 지난해 슈퍼마켓 운영을 위한 표준 공급망관리(SCM) 모델을 개발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영국 테스코 본사의 지시로 삼성테스코 SCM본부가 개발한 것이다.
‘익스프레스 서플라이 체인’이라고 불리는 이 모델은 향후 테스코그룹의 전 세계 모든 슈퍼마켓에 적용될 계획이다. 도쿄·맨해튼 등 전 세계의 각 도시에 소재한 테스코 슈퍼마켓은 앞으로 이 모델을 기반으로 매장 운영을 위한 창고 배치와 운송 전략 등 최적의 물류 전략을 운용하게 된다. 테스코가 AMR리서치의 글로벌 SCM 톱25 평가에서 15위에 랭크될 정도로 글로벌 SCM 기업 중 돋보이는 상위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법인이 이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도맡아 수행했다는 점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삼성테스코 SCM본부 인력들은 약 6개월만에 물류 네트워크 전략 및 물류센터 운영 모델, 운송 전략 및 운영, 점포 배송 및 보충 등 슈퍼마켓 운영에 필요한 핵심적인 물류 기준 및 운영 방식을 모두 완성했다.
이 작업이 한국에서 이뤄진 배경에 대해 윤현기 삼성테스코 SCM본부 상무는 “테스코그룹의 전 세계 사업장 중 한국 홈플러스 SCM의 핵심성과지표(KPI)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특히 저가격 운영과 안전관리·인적 역량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도 다른 나라의 테스코 임직원들이 벤치마킹을 위해 방한하고, 한국의 SCM 직원들은 중국·터키 등의 물류 네트워크 구축 및 물류센터 설립을 위해 파견을 나갈 정도로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뿐만 아니다. 테스코 본사는 삼성테스코 SCM본부가 개발한 이산화탄소 저감 기법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테스코가 국내 벤처기업과 공동으로 개발한 ‘리블렛 코팅 기법’이 그것이다. 이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개발한 리블렛 원리를 세계 최초로 운송수단에 적용한 것이다. 이 기술을 이용해 차량에 도색을 하면 운송 중 차량의 공기저항이 크게 줄어들어 연료 소모량이 20%가량 절감된다고 한다. 삼성테스코는 지난달 영국 본사에서 이 기술을 직접 시연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테스코그룹 본사가 삼성테스코의 베스트 프랙티스에 감동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테스코그룹이 2002년 그룹 최초로 진행한 글로벌 제품관리시스템(PMS) 구축 프로젝트도 삼성테스코가 주도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영국 본사를 비롯해 전 세계 테스코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솔루션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7, 8개국에서 150여명의 인력이 동원된 이 프로젝트에는 한국 인력만 40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삼성테스코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 본사 인력은 20여명이 참여했다. 이어 삼성테스코는 2005년 테스코의 표준 IT시스템 총괄 프로그램인 ‘TINAB(Tesco in a Box)’ 개발도 주도했다. 이 시스템은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거쳐 현재 테스코그룹의 글로벌 OM(Operation Model) 모델의 기반이 됐다.
◇ 푸르덴셜생명 글로벌 표준 계약관리시스템 만든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은 지난해 말 새로운 아키텍처와 사상에 기반한 차세대시스템 개발에 성공했다. 푸르덴셜생명 미국 본사는 한국법인이 캐나다의 솔콥(현 HP)과 개발한 차세대 보험계약관리시스템인 ‘래디언스’를 글로벌 표준 시스템으로 선정하고 본사 및 일본·대만·폴란드 등 해외 법인에 순차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은 차세대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업무 프로세스 혁신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MDA(Model Driven Architecture) 방법론을 채택했다. MDA는 플랫폼 독립적인 모델링으로 향후 비즈니스로직이 변경될 때 특정 플랫폼에 구애받지 않고 모델만 수정해도 프로그램을 손쉽게 변경할 수 있도록 한 방법론이다. 특히 금융회사의 경우 개발과 변경에 필요한 업무 단계가 줄어드는 만큼 신상품 개발 기간 등을 단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김용태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 부사장은 “한국의 금융IT 인력들은 기존 시스템을 완전히 새롭게 개선하기 위해 과감하게 신기술을 도입하고, 심지어 리스크까지 감당하겠다는 혁신 의지가 강하다”면서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도 1년여의 테스트 과정을 거쳐 MDA 방식을 적용한 차세대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냈다”고 말했다.
푸르덴셜생명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화면설계, 업무로직 설계, 계산식 구현 등을 지원하는 시각화된 3가지의 모델링 툴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소프트웨어 설계시 더 간단한 프로세스로 설계변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푸르덴셜생명 한국법인은 래디언스가 전 세계 푸르덴셜생명 법인에 공급된다면, 결국 푸르덴셜생명의 각국 법인의 IT 역량을 제고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부사장은 “일반적으로 일본 금융업계의 경우 리스크에 대한 우려로 인해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기 보다 부분적인 개선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의 금융IT 종사자들은 변화 의지가 강해 이런 도전을 할 수 있게 됐고, 프로젝트 성공을 통해 독보적인 기술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 앰코테크놀로지의 글로벌 PLM 만든 앰코코리아
글로벌 반도체 패키징업체인 앰코테크놀로지가 지난해 2월 개통한 글로벌 PLM 시스템은 한국법인의 IT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매니저(PM)를 포함해 엠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IT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팀이 주도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된 약 1년간 미국·대만·필리핀·중국 등 각 지사에서 PLM담당자들이 2개월마다 직접 서울에 와서 1주일씩 머물며 회의를 할 정도였다. 엠코테크놀로지는 지난해 전 법인에 걸쳐 1단계 시스템 가동에 성공했으며, 현재 고도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본사 주도로 추진됐지만 몇 차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실상 포기상태였는데,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가 2008년 1월부터 시작해 1년만에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이후 고도화 작업도 주도적으로 수행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 본사 임원진이 ‘본사가 몇 년에 걸쳐 진행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프로젝트를 한국인이 하니까 1년 만에 되더라’며 놀라워했다고 엠코코리아측은 전했다. 특히 국내 전문가들의 프로젝트 추진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두현 앰코코리아 PLM 프로젝트매니저는 이에 대해 “외국인들은 힘든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이를 ‘합리적으로’ 판단해 포기 결정을 내리곤 하지만 우리는 목표를 꼭 달성하겠다는 근성으로 끝까지 도전하려는 열정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그 비결을 설명했다.
박 팀장은 “특히 프로젝트는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추진해서 장애요소가 나타나기 전에 마무리해야 성공 확률이 높은데 이처럼 단기간에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은 한국인이 훨씬 우수해 프로젝트 추진에 힘이 되곤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앰코코리아는 앰코테크놀로지의 글로벌 표준 ERP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앰코코리아의 IT부서인 ICS팀은 지난 2007년 글로벌 표준 ERP 시스템을 먼저 완료한 후 이를 전 세계 법인으로 확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계 각지를 다니며 기술 지원을 하고 있다.
◇ 미국 이베이가 유일하게 IT 독립성 인정한 이베이옥션
2009년 7월 7일 분산서비스거부(DDoS) 공격으로 시스템 대란이 일어났을 때 이베이옥션의 최승돈 기술총괄 부사장은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보안시스템을 관리하는 미국 이베이 본사에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몇 시간째 무방비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이베이옥션은 분당 수천만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최 부사장은 과감하게 미국 본사와의 네트워크를 끊은 후 국내 IT인력들과 협의해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수 시간을 애태우던 문제가 단지 몇분만에 해결됐고 옥션 사이트는 정상화됐다.
위급 상황에 따라서는 국내 실정에 맞는 대응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한 최 부사장의 자신감과 과감하게 본사를 설득해 해결책을 강구한 결단이 문제해결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사실 최 부사장은 이 사건이 생기기 전부터 본사 임원진에게는 주관이 뚜렷한 기술전문가라는 인식이 강했다. 4, 5년전 본사의 글로벌 IT 통합체계 구축 방침에 반대해 한국만 독자적인 IT거버넌스 체계를 유지하도록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35개국에 있는 이베이 정보시스템을 미국 본사에서 일률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이베이가 중국 법인의 정보시스템을 통합한 데 이어 한국 이베이옥션의 정보시스템마저 통합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와중에 최 부사장이 “한국만큼은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시스템 통합을 반대했다.
이베이 본사 중역들이 최 부사장을 설득하려 했지만 최 부사장은 오히려 이베이의 임원진을 끊임없이 설득해 결국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 이베이옥션만 수백명의 한국인 개발 인력과 독립된 정보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재 이베이옥션은 이베이가 독립성과 함께 IT 역량의 우위를 인정해 준 유일한 해외법인이다.
앞서 시스템을 통합한 일본과 중국 지역에서는 시스템 부하로 인해 인터넷 속도가 떨어지고 영업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사업을 철수하기에 이르렀지만 한국 이베이옥션은 오히려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현재 전 세계 이베이 매출의 10% 규모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다.
결국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과감하게 ‘노(No)’ 라고 답했던 최 부사장의 의지와 한국 IT인력과 기술에 대한 글로벌 본사의 믿음이 어우러지면서 이베이옥션이 본사의 롤모델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최 부사장은 그 비결에 대해 “한국인의 높은 열정과 뚜렷한 목표의식 그리고 근성까지 갖춘 고급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이베이옥션은 한국에 아시아지역 데이터센터 허브를 구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 부사장이 직접 부지를 찾아 다니고 있으며, 대량의 데이터를 독자적이면서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향후 이를 아시아 지역의 데이터센터 허브로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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