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가상로봇(virtual robot)

[이머징 이슈] 가상로봇(virtual robot)

 로봇산업이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을 대체해온 기계장치가 엉뚱하게도 사이버 공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것을 삼키는 웹의 영향력 속으로 빨려들어간 로봇기술은 차츰 물질성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얼굴로 일상 곳곳에서 유비쿼터스한 영향력을 행사할 전망이다.

 

 오는 25일 서울 코엑스 3층 홀에서는 세계 최초의 ‘가상로봇경진대회(Virtual Robot Challenge 2010)’가 열린다. 그동안 우후죽순 생겨난 각종 로봇대회는 거의 대부분 이족보행로봇의 격투기로 승부를 가리거나 창작로봇의 독창성을 뽐내는 자리였다.

 이번에 개최되는 가상로봇경진대회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행사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경기에 참여하기 위한 로봇선수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주최 측이 준비해놓은 PC 몇 대와 커다란 프로젝터 화면이 무대 중앙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로봇은 어디에 있을까. 가만히 보니 모니터 화면 속의 바퀴 달린 로봇 아이콘들이 가상 경기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점수를 따고 있다. 단순한 동영상이 아니라 제대로 설계한 로봇을 시뮬레이션 SW로 생명을 불어넣고 사이버 공간에 풀어놓은 것이다.

 ◇가상로봇경진대회(Virtual Robot Challenge)=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주관하는 가상로봇경진대회는 문자 그대로 온라인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로봇대회다.

 그동안 개발자가 신형 로봇을 설계하면서 컴퓨터로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사례는 많았지만 순전히 SW코드로 만들어진 가상로봇을 가지고 온라인 경기대회를 개최하는 사례는 세계 최초다. 모처럼 IT강국으로서 외국과 차별화되는 독창적인 로봇 문화가 생겨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이호길 생기원 박사는 로봇 개발에 따른 현실적 제약조건을 가상공간에서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소비자가 직접 원하는 로봇을 제작하는 작업은 값비싼 부품과 설계 및 조립 노하우가 없는 상황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온라인 3D 가상환경에서 누구나 가상의 로봇을 조립하고 테스트할 수 있다면 로봇 분야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여기에 다양한 네티즌이 집단협업으로 서로 기술을 비교하고 경쟁하는 멍석만 깔아준다면 세컨드 라이프와 같은 가상공간에서도 로봇 생태계가 꽃필지도 모른다. 다소 튀는 발상은 뜻밖에도 지경부과제로 채택됐고 올해는 관련기술을 이용한 가상로봇경진대회가 실제로 열리는 성과를 거두게 됐다.

 가상로봇경진대회는 모든 경기가 온라인 상에서 치러진다. 참가팀은 ED가 개발한 가상로봇 시뮬레이터SW ‘EDRS’에서 원하는 설계와 부품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로봇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대회에 투입된 가상로봇은 태양빛으로 재충전하면서 가상의 경기장에서 점수를 따내는 포스트를 되도록 많이 통과해야 한다.

 주최 측은 가상로봇이 통과하기 어렵도록 가상경기장에서 경사진 언덕과 벽, 건물 등 다양한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참가팀은 EDRS로 각 경기의 미션수행에 최적화된 가상로봇을 설계하고 작전을 수행하면 된다. 가상경기장에서 제대로 미션을 수행하지 못 하는 로봇은 현실공간에서 설계대로 재현해도 실망스런 결과를 낳는다.

 기존 로봇대회에 비하면 가상로봇대회는 장점이 무척 많다. 일단 로봇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비, 참가비가 공짜고 굳이 대회장에 갈 필요도 없다. 참가자 입장에서 로봇 개발에 따른 부담이 전혀 없는 자유로움(Free)은 그동안 연구실에서 해보기 어려웠던 많은 시도를 해보게 돕는다. 인터넷 접속이 되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Open)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4월까지 온라인 로봇포털(www.robot114.com)에서 가상로봇경진대회의 예선전이 진행됐고 상금 1000만원이 걸린 본선에는 16개 팀, 80여명이 참여한다.

 박종환 생기원 연구원은 “가상로봇경진대회는 머지않아 세컨드라이프와 유사한 온라인상의 ‘로봇가상타운’으로 발전합니다. 누구나 쉽게 로봇을 만들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가상 생태계가 만들어지면 실제 로봇산업에도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고 장담했다.

 ◇UCR(User Created Robot)=가상로봇과 관련해 교육용 로봇 분야에서 UCR라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UCR는 ‘사용자 제작로봇’(User Created Robot)의 약자로 어린 학생이 직접 로봇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온라인 가상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요즘 초등학교에선 교육용 로봇키트를 조립하는 강좌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어린이가 로봇키트를 조립해본 노하우가 회사마다 제각각인 부품체계로 공유되지 못 하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A사의 로봇키트로 온갖 작동완구를 만들어 봤던 경험이 B사의 로봇키트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어쩌다 A와 B사의 부품들을 모아 스케일이 큰 로봇 작품을 조립하려 해도 다른 회사 부품과의 호환성 여부를 알 수 없다. 결국 대부분의 학생은 손에 익숙한 로봇키트 상자의 제한된 부품으로 몇 가지 작품을 조립해보는 것으로 강좌를 마친다.

 로보로보, 로보티즈, KMC로보틱스, 과학상자 등 12개 교육용 로봇업체는 현재 시판 중인 로봇키트가 서로 호환성을 갖게 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기업은 서로 디자인이나 규격이 다른 수많은 로봇키트를 하나로 통일하는 대신 가상시뮬레이션 기술을 이용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우선 각 회사가 보유한 로봇부품을 하나의 XML 체계로 정리해서 온라인상에 올려놓는다. 소비자는 전용사이트에 접속해서 A와 B사의 로봇부품이 서로 호환이 가능한지를 맞춰보고 자유롭게 가상 로봇을 조립한다. 로봇의 HW 외에 SW 부문 호환성을 위한 중간언어도 새로 만들었다.

 덕분에 여러 회사 부품을 혼용한 가상로봇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을 쉽게 짜고 온라인상에서 미리 작동시켜 볼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호환성이 결여된 로봇부품을 일종의 ‘사이버 레고블록’으로 만들어서 자유롭게 해체하고 조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UCR 프로젝트에 따라 현재 시판 중인 로봇모터, 센서, 부속품 수백개의 3차원 구조와 기계적 특성이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교육용 로봇시장은 무조건 박스단위로 주문하는 방식을 벗어나 미리 온라인 공간에서 이리저리 원하는 가상로봇을 만들어 보고 최적화된 부품을 골라서 구입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는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서 교육용 로봇기업의 매출 향상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UCR의 성공이 로봇교육에 미칠 가장 큰 변화는 손재주가 뛰어난 학생 혼자서 칭찬받기보다 공유와 협업을 통한 집단창작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현상이다.

 UCR사업에 참여하는 조혜경 한성대 교수는 “언젠가는 한국과 일본, 미국 어린이가 온라인 공간에서 함께 커다란 로봇인형을 개발할 수도 있겠죠. 로봇의 가상화는 교육 현장에서 로봇 학습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가상로봇의 미래=네트워크 경제에서 화폐는 귀금속이 아니라 탈물질화된 전자신호로 바뀐다. 기계로봇도 거추장스러운 금속성 허물을 벗어버리면 일종의 정보체계로 변한다.

 혹자는 기계로봇이 가상공간에서 게임 캐릭터 이상의 무슨 의미를 가질까 의구심을 제기할 것이다. 가상로봇이 온라인 판타지 게임의 주인공과 근본적으로 다른점은 로봇의 움직임이 현실세계의 물리법칙과 기계적 성능에 의해 엄격한 제약을 받는 것이다. 즉 가상로봇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언제라도 현실세계로 튀어나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준물질적인 존재다.

 괴상한 기계들이 서로 때리고 부수는 화끈한 로봇격투기를 기대하는 관객에게 모니터 속 가상로봇의 아기자기한 생태계는 퍽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상로봇은 표준화된 로봇 부품과 SW 환경의 보급에 따라 수년 내 지구상 어디서라도 쉽게 복제되고 집단협업에 의해 놀라온 속도로 기능과 형태가 진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가상로봇은 그동안 전문가들이 독점해온 로봇 개발 영역에 일반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는 전환점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모든 사회분야에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로부터 대중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와 같은 협업과 공유의 개념이 로봇 산업에 도입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저명한 과학자가 아니라 온라인 로봇동호회의 10대 청소년이 방학숙제로 깜짝 놀랄 만한 로봇제품을 만들었다는 뉴스가 나올 것이다.

 머지않아 사이버 공간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로봇과학자의 꿈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