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업체와 수동부품 업체 간 ‘파워 구도’가 1년 만에 180도 바뀐 것은 그만큼 부품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세트 제품의 판매는 가파르게 늘어났다. 부품 품귀가 이런 세트업체들의 발목을 잡았다. 1년 전만 해도 부품업체에 판가를 낮추라고 압력을 가한 세트업체들은 이제 라인 앞에 진을 치고 가격을 묻지도 않고 생산물량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수급 불안 상황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경기 회복을 계기로 세계 시장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려는 세트업체에는 상당한 타격을 줄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LCD·PDP·LED TV를 840만대 판매해 세계 시장 점유율을 19.2%에서 20%로 높였다. 휴대폰 판매도 전년 동기 40% 증가한 6430만대를 기록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도 20%에서 22%로 높였다. LG전자도 1분기에 600만대의 평판TV를 판매했으며, 2710만대의 휴대폰을 전 세계 시장에 공급했다. 동계올림픽에 이어 월드컵 등 대형 스포츠 행사로 인해 한국산 전자제품 수요는 하반기에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품 조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시장을 뻔히 보면서도 팔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더욱 큰 문제는 최근의 품귀 사태가 우리 부품산업에 ‘반짝 효과’만 줄 뿐이라는 점이다. 콘덴서·트랜스포머 등 수동부품은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이다. 부품 수요가 갑자기 증가해도 공급량을 짧은 시일 안에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수동부품 업체들은 업황과 수익성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그동안 생산 규모를 줄여 왔다. 지금 상황이 좋다고 다시 늘려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언제 시황이 나빠져 세트업체들이 태도를 바꿀지 모르니 과감한 투자도 곤란하다.
세트업체들의 공급망 관리에 한계를 노출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지난해까지 세트업체들은 무리한 수준으로 수동부품 판가 인하를 진행해왔다. 부품 조달 비용 절감으로 인한 이익은 늘었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공급 관리가 어려워졌다.
글로벌 소싱 확대로 국내 전자부품 업계의 생태계는 이미 파괴됐다. 중국산 부품 조달 비중이 매년 증가한다. 다만 중국 부품 업체들은 여러 회사와 거래하고 있어 공급 부족 상황에서 변수가 많아진다. 판가 상승을 요구하면서 물량을 주지 않거나, 약속을 번복하고 다른 회사에 물량을 넘기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판가하락 속에 국내 수동부품 업체들은 기존 사업을 포기하거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신규사업을 진행해 왔다. 기존 사업에 투자하느니 신규사업이 수익성 확보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심지어 라인을 풀 가동하는 업체조차 생산 규모 확대에 회의적이다.
“부품업체들이 기존 사업이라도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세트업체들이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단가와 물량 협상을 벌여야 한다” 이참에 이런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는 부품업계의 목소리가 날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