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만을 위한 혁신이 아닌, 구성원들을 위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최근 한 콘퍼런스에 강연 차 참석했다가 런던경영대학원 도널드 설(Donald Sull) 교수의 ‘미래 10년의 불확실성을 기회로 만드는 기업경영전략(Upside of Turbulence)’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들었다. 당시 설 교수는 ‘민첩성(Agility)’과 ‘맷집(Absorption)’ 두 개념을 향후 10년간 이어질 ‘혼돈의 시대’에 기업이 성장 또는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 요소로 소개하며, 즉석에서 참석자들 스스로 자신의 회사 수준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민첩성은 경영자들이 시장의 변화와 새로운 기회에 대한 정보를 조기에 포착하고,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다. 맷집은 불확실한 시장에서 모든 상황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해 낼 수는 없는 만큼 충격이 발생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이 두 개념 모두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근 애플과 구글로 대변되는 민첩성 기반 기업의 급격한 성장과, 맷집을 갖추지 못해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서 사라져간 다수의 기업 간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급증하면서 이 개념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민첩성과 맷집에 대해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무하마드 알리나 조지 포먼 같은 권투선수들을 예로 들어본다. 상대를 압도하는 스피드를 강점으로 가진 알리 같은 경우는 민첩형으로, 수 차례의 주먹세례를 견디며 상대에게 다가가 치명적인 펀치를 날리는 포먼의 경우를 맷집형 선수로 분류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민첩형인 알리는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맷집을 키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성장하고 영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회를 포착해서 남들보다 빨리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민첩성을 갖춰야 하지만, 예기치 못한 환경 변화가 발생하더라도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맷집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프로세스혁신(PI)이나 비즈니스프로세스개선(BPR) 등의 혁신 활동들이 결국 기업의 민첩성과 맷집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라고 본다. 기업의 프로세스를 가시화하고, 불필요한 프로세스는 제거해 자동화하는 일련의 혁신 과정들은 기업이 시장의 변화를 조기에 감지해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며 예측하지 못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체질로 개선한다.
하지만 기존의 프로세스 기반 혁신은 기업 운영의 효율성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 구성원들에게 끊임없는 헌신과 노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혁신이 장기간 지속되면 기업의 외형은 성장하더라도, 오히려 구성원들의 업무 몰입도가 낮아지고 이에 따라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도 있다.
한국의 근로자는 1년에 평균 2316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이는 OECD 평균보다 80일가량이 더 길며, 30개 회원국 중 노동생산성이 22위다. 긴 노동시간과 낮은 업무 몰입도는 구성원들에게 창의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거나, 자기계발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가질 여유가 없게 한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민첩성과 맷집 자체를 약화시키게 된다.
이 때문에 최근 몇몇 기업은 기업의 프로세스 효율을 높이기 위한 혁신에서 나아가 구성원들의 실제 업무 개선 중심의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일하는 방식을 개선해 핵심 업무와 창의적 업무 중심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사무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업무 외적인 소요시간을 최소화하고 업무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실제 최적의 사무환경을 제공하며 업무시간의 20%는 창의적인 일에 쓰기를 종용하는 구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업무책임제와 정시퇴근, 플렉시블 타임 근무제를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여성인력들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직장생활을 유도하고 있는 LG생활건강이나, 3일 근무 3일 휴식이라는 파격적인 근무체계를 도입해 생산성과 직장 만족도 향상을 동시에 얻는 삼정P&A의 노력은, 구성원들을 위한 혁신이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쟁력 확보에 기반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 업무 중심의 혁신을 통해 구성원들은 핵심 업무 및 창의적 업무에 몰입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가치 창출과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고, 기업은 구성원들의 조직에 대한 만족도와 자발적인 창의적 업무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프로세스 혁신은 단순히 시스템을 구축하고 개선하는 작업이 아니며 요컨대 기업과 구성원 모두의 민첩성과 맷집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구성원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참여와 혁신을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혁신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현병탁 LG디스플레이 업무혁신담당(상무) hhhyun@lgdispl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