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웰빙과 느림의 철학이 퍼지면서 트레킹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산의 정상을 향해 가는 등산은 상당히 목적 지향적인 데 비해 트레킹은 과정 지향적이다. 트레킹 코스는 일반적으로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 고령자와 여성에게도 잘 맞는다.
그런데 트레킹이 너무 일반화되어서일까. 다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트레킹에서 한발 더 나아가 순례가 점차 인기를 끌고 있다. 순례(pilgrimage)는 성지를 따라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라 종교적 색채가 짙다. 성지순례는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고자 할 때 혹은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전 세계적으로 순례길은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슬람교·천주교·기독교·불교 등 여러 종교에서는 상징적이고 유명한 순례길들이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로 가는 이슬람교 순례가 가장 유명하고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로 가는 천주교 순례길, 인도의 부다가야로 가는 불교 순례길도 유명하다.
일본에는 불교 순례길로 오헨로(お遍路)가 유명하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인 시코쿠섬 해안선을 따라 총 1400㎞, 88개의 사찰을 방문하며 순례하는 길이 바로 오헨로다. 일본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 신곤슈(眞言宗)의 창시자인 고보다이시(弘法大師)가 1200년 전 시코쿠 해안가를 따라 수행하면서 연을 맺은 곳에 사찰이 잇따라 들어섰고, 사람들이 이 사찰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순례하는 전통이 생겼다. 시코쿠 섬의 동쪽인 료젠지에서 시작하여 섬을 시계 방향으로 순환한 뒤 40여일 후에 오쿠보지에서 끝난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들어 순례길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불교면 사찰 순례, 천주교면 성당 순례 식으로 종교별로 순례하는 것도 있지만 전북에서는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순례길이 있다. 사단법인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은 불교·원불교·개신교·천주교·증산교·천도교·대종교의 여러 종교사적지를 180㎞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을 2009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순례를 풀코스로 가려면 9박 10일이 걸린다. 나는 모악성지인 금산사에서 출발하는 순례를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봤다.
등산에서 트레킹으로, 또 트레킹에서 순례로 관심이 변하고 있다. 그러면 순례 다음에는 어떤 방식의 도보여행이 인기를 끌까. 혹시 유배(exile)가 아닐까.
과거 조선시대처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강압적 유배를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시골로 자발적 유배를 간다. 이곳에 가면 물론 휴대폰도 꺼야 하고 전기 공급 없이 깜깜하게 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집 주위에 울타리를 쳐놓고 칩거하며 텃밭에서 채소를 길러 자급자족하면서 살면 더욱 유배 분위기가 날 것이다. 집필 활동이나 예술 생활을 하면 진정한 유배 느낌이 날 것이다. 유목형 순례가 싫으면 정착형 유배를 시도해보라.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이사 mjkim896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