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이제 시작됐다.”
1997년 5월 11일 뉴욕의 한 건물.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컴퓨터와의 체스 경기에서 진 후 이 같은 말을 남겼다.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는 15년 동안 세계 정상을 지킨 카스파로프를 2승 3무 1패의 성적으로 이기며 전 세계를 떠들석하게 했다. 일부 호사가들은 이 사건으로 당장에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컴퓨터가 발명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실제로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몬드 커즈와일은 1985년 그의 저서에서 “1998년이면 컴퓨터가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딥블루는 커즈와일의 예상보다 1년 앞서 이를 실현시켜 기대감을 높였고, 인공지능 컴퓨터에 대한 연구에 힘을 더했다.
딥블루는 이를 개발한 IBM에 큰 변화를 줬을 뿐 아니라 컴퓨터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IBM 연구진은 수많은 경기 결과를 분석하고 경우의 수를 예측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체스 전략을 파악했고, 다시 한번 성장했다. 이후 체스, 포커 등에서 컴퓨터와 인간을 대전하게 하는 시도는 지속됐고 컴퓨터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물론 아직까지 체스보다 변수가 많고 복잡한 바둑에서는 컴퓨터가 인간의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바둑에서의 규칙과 변수만 완전히 파악되고, 2차원으로 배열된 탄소나노튜브를 3차원으로 배열한다면 10년 이내 바둑 경기도 컴퓨터가 우세할 것으로 내다봤다.
IBM은 2009년 인간과 퀴즈쇼 경쟁을 대등하게 펼칠 ‘제퍼디’라는 컴퓨터를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연구를 하고 있는 IBM조차 퀴즈쇼 컴퓨터인 ‘제퍼디’가 인간 도전자를 물리칠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이는 인공지능을 향한 대단한 도전이다. 체스나 바둑은 정해진 규칙과 제한된 수의 연산 과정을 거쳐 경기를 진행하면 되지만, 퀴즈쇼는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한층 더 복잡한 연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0년간 인공지능 연구가 활발했지만 아직도 컴퓨터가 스스로 말을 하고,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이유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복잡하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준다.
카스파로프의 말처럼 인간과 그 자신이 만든 기계의 경쟁은 시작됐고,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체스와 같이 특정 능력에서는 컴퓨터가 인간을 앞지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의 지적능력은 연산작용과 수읽기 이상의 공감각적인 요소까지 포함해 컴퓨터가 이를 쉽사리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성패는 무승부로 결론이 날지도 모르겠다. 카스파로프가 1997년 첫 패배 이후 딥스로트, X3D 프리츠와 같은 슈퍼컴퓨터와 대전에서 늘 무승부로 끝을 맺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