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아이폰 출시 이후 스마트폰 열풍에 휩싸인 국내 통신시장은 다양한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의 출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무선인터넷 요금제 상품 등이 잇따라 등장하며 모바일 인터넷 시대로의 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스마트폰 확산으로 촉발된 무선 데이터 트래픽의 증가는 과거 텍스트 중심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벗어나 사진·동영상 등 멀티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서비스의 확대로 날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그동안 유선 환경에서 빚어졌던 ‘망중립성(Network Neutrality)’ 논란이 4세대(G) 네트워크 투자가 본격화되고 있는 무선 시장으로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12일 정부와 업계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망중립성 포럼’이 결성돼 ‘망중립성 쟁점과 과제’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갖는 등 공론화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특히 이 같은 논의는 최근 다양한 활성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국내 무선인터넷 환경에서 유무선을 아우르는 망중립성 논의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망중립성이란=‘망개방’이라는 개념으로도 사용되는 망중립성은 지난 2002년 미국의 팀 우 교수가 밝힌 ‘망중립성을 위한 제안(A Proposal for Network Neutrality)’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화됐다. 이에 따르면 초고속인터넷 사업자는 네트워크와 이용자들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는 한 인터넷망의 모든 콘텐츠·사이트·플랫폼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게 망중립성이다. 이는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는 자신이 운영하는 망에 접근하는 모든 트래픽을 차별 없이 처리해야 하고 이용자는 인터넷망을 이용해 합법적인 콘텐츠·애플리케이션 등에 자유롭게 접근, 이용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또 콘텐츠·애플리케이션 사업자들은 자신의 상품을 전송 및 운영하는 과정에서 추가적인 이용대가를 지급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 이 화두는 2005년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망중립성 4원칙(콘텐츠전송·애플리케이션 및 서비스 접근·기기의 접근·경쟁의 혜택)을 발표하면서 표면화됐다. 지난 2009년 10월 오바마 정부를 통해 ISP의 합리적인 네트워크 관리는 허용하지만 특정 콘텐츠·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네트워크 관리 운영방침의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두 가지 원칙이 추가됐다.
FCC가 망중립성 규칙안을 발표하며 제도화를 적극 꾀하는 한편, 기존의 유선망과 함께 무선인터넷에도 비슷한 정책적 입장을 적용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지만 아직 유선사업자들의 반발로 넘어야할 이슈가 많은 상황이다.
◇국내서도 부상하는 망중립성=국내에서도 망중립성 논란은 새롭지 않다. 이미 지난 2006년 LG파워콤이 하나로텔레콤에 임대한 광동축혼합망(HFC)에서 하나TV 트래픽을 차단하면서 망중립성 논쟁이 불거졌고, 2008년에는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사업법 제정 시 망을 보유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업자의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한 IPTV 사업이 가능하도록 해 망개방의 개념이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별정통신사업자가 기간통신 사업자의 회선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기간사업자와 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이 논란 속에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이는 앞서 열린 망중립성 포럼의 세미나에서도 확인됐다. 이 세미나에서 공성환 KT 상무는 “콘텐츠나 포털·애플리케이션 사업자들은 네트워크 사업자들의 망을 이용해 수익을 낸 만큼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라 망관리 비용을 분담하고, 트래픽 관리 등을 통해 망의 혼잡도를 감소하는 데 적극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m-VoIP는 투자 위험을 감내한 망사업자의 투자의욕을 저하시키는 대표적인 ‘무임승차’이자 국내법 위반 행위”라며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반면에 콘텐츠 사업자 측 발표자로 나선 배동철 스카이프 상무는 FCC의 ‘망중립성 6대 원칙’을 인용해 “합법적인 콘텐츠와 애플리케이션, 서비스에 대해서는 망사업자가 차별없이 취급해야 한다”며 여전히 상반된 시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는 망중립성 논쟁의 또 다른 한 축인 네이버 등 포털 사업자들이 참여하지 않아 입체적인 논의에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 사업자들 역시 망 사업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트래픽을 유발하며 돈을 벌지만 설비투자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말 그대로 ‘내가 차린 밥상에서 수저만 얹어’ 자신의 배를 불리는 무임승차 손님이다.
김희수 KISDI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망사업자의 백본 접속용량은 지난 2004년 536G에서, 2008년에는 2286G로 연평균 약 44%씩 급증하고 있다”며 “2002년 KT의 시가총액이 16조원으로 NHN의 48배였지만 지난해에는 1.27배 수준으로 그 차이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며 이 같은 논란의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포털과 같은 망중립성 지지 진영은 망사업자들이 인터넷전화 등 각종 부가서비스에까지 가세할 경우 반경쟁적 시장질서가 형성되고 이는 곧 소비자의 만족과 서비스 혁신에 역행할 수 있는 만큼 통신망을 공공재의 성격에서 해석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무선인터넷 활성화를 통한 IT강국 재현을 위해 망의 중립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당위성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은 단순한 네트워크 서비스 외에 다양한 콘텐츠·애플리케이션 서비스 등 부가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혁신적인 망투자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망사업자들의 반론에 부닥친다. 이처럼 지난 2002년 이후 꾸준히 공방 속에 논의를 발전시켜온 미국 등과 달리 국내의 망중립성 논의는 시장주체들이 서로 입장만을 재확인하는 수준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스마트폰 열풍으로 가속화=더욱이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우리 시장에도 무선인터넷의 망중립성 논쟁이 불거질 전망이다. 아직은 관련 주체들이 관망세 속에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미국에서처럼 스카이프와 같은 모바일인터넷전화(m-VoIP)의 망개방 이슈도 언젠가는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무선인터넷 진흥기 초입에 이른 국내 이동통신시장은 이미 지난 1분기에 스마트폰 100만대 시대를 넘어선 데 이어 올해 400만∼500만대에까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또 스마트폰을 위시한 태블릿PC·넷북·멀티미디어인터넷기기(MID) 등과 와이브로·와이파이 등을 이용한 무선인터넷 트래픽 증가세도 뚜렷해지고 있다. 이미 아이폰을 도입한 KT의 지난해 4분기 데이터 매출이 전년 동기와 비교해 33.6%나 증가한 데서도 확인된다.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는 망사업자, 포털, 콘텐츠 사업자 등 모든 주체의 상생과 혁신이라는 대명제를 위한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이 참에) 유무선을 아우르는 망중립성 논의를 본격화해 IT강국 재현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정환기자 victolee@etnews.co.kr
지금 미국에서는
비록 우리보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꾸준히 진행돼 왔지만 미국 역시 ‘망중립성’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최근의 분위기는 망중립성 규제를 겨냥한 오바마 정부의 의지가 더욱 강력해지고 있지만 케이블TV 등 망보유 업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미 정부는 망중립성 확보를 통해 망사용 비용을 낮춰 통신·미디어 산업의 경쟁 활성화와 혁신을 이끌겠다는 계획이지만 업계는 이 같은 규제가 자신들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이는 지난 10일부터 나흘간 열린 ‘2010 케이블TV 쇼’에서도 확인됐다. 13일 케이블TV쇼의 주요 세션 연사로 참석한 제나코우스키 위원장은 정부의 규제 강화는 미국 광대역 통신망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 있을 뿐 특정 업체에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구글과 애플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도 돌려세워 앞으로 등장하게 될 유망 신생 기업들을 위한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이는 정부의 광대역통신망 규제 강화 계획에 적극 반발하고 있는 케이블TV 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행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이 위기감 속의 망사업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서 카일 맥슬래로 미 케이블TV방송협회(NCTA) 회장은 “FCC가 규제 권한을 들이댐으로써 케이블의 경쟁자이면서 망중립성의 옹호자인 구글과 애플의 입지를 도와줄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같은 대립각은 최근 내려진 FCC와 법원의 서로 다른 판결로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2008년 FCC는 P2P업체 비트토런트의 트래픽 업로드를 방해한 망사업자 컴캐스트에 망중립성 원칙을 위배했다며 시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지난달 법원이 컴캐스트의 트래픽 처리 행위를 규제할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시해 사업자 측의 손을 들어줘 FCC가 어떻게든 업계와의 타협을 모색해야 하는 국면을 맞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망중립성 논쟁이 어떤 방식으로 귀결될지는 차후 우리 통신업계에 대한 규제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국내 관련업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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