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융·복합 경쟁 불붙었다

# 2015년 서울의 한 초등학교. 자율학습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아이패드를 꺼내 든다. 모든 학생은 각자 아이패드 안에 가상의 `러닝 메이트(learning mate)`를 가지고 있다.

러닝 메이트는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는 가상의 친구에 가깝다. 내가 문제를 풀지 못하면 같이 수정해 나가며 지식을 새로 익혀간다. 반복적으로 틀리는 부분이 생기면 친절하게 맞춤형 자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처음엔 모든 러닝 메이트가 똑같이 만들어졌지만 학생 개인의 특성에 따라 나중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장병탁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준비 중인 연구 과제다. 인공지능 컴퓨터 연구에만 몰두하던 장 교수가 교육용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교육학 교수들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장 교수는 "신종호 교수(서울대 교육학과)를 비롯해 수많은 교육학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왜 이런 영역을 진작 몰랐을까 하며 무릎을 쳤다"고 말했다. 최근 교육학에서 각광받는 `자기 주도형 학습`을 인공지능 컴퓨터에 적용한 것이다.

장 교수는 "개발만 잘하면 해외 온라인 교육시장으로 수출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2013년 세계 온라인 교육 시장 규모가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수익성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대학가에 융복합 열풍이 거세다. 학과 간 두꺼운 벽을 쌓고 지내던 교수들이 손을 잡고 연구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아예 벽 자체를 허무는 것이 대세가 됐다. 성균관대학교는 문과, 사회과학, 경제학, 자연과학부를 문리과 대학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연세대학교는 송도 국제캠퍼스에 융합학과를 설치한다.

■ 서울대 언론정보 + 컴퓨터공학 융합전공…고려대 하이브리드 교양강좌 개설 예정

연세대는 2012년 학부과정으로 나노과학과 환경ㆍ에너지 기술을 배우는 공대 융합전공을 개설하고, 이듬해엔 의대와 공대, 자연대 교수진이 참여하는 의생명 과학기술대를 설치할 계획이다.

이명박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월드 클래스 유니버시티(WCU)사업도 융ㆍ복합 흐름에 일조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WCU 융합오믹스 의생명과학과는 노화와 암, 대사성 질환에 대한 연구를 의학과 생명과학을 연계해 연구한다. 고려대학교 WCU뇌공학 사업단은 심리학과, 정보통신대학 등이 공동으로 뇌공학을 연구한다. WCU사업은 학과 기준이 아닌 연구 주제 단위로 연구학자를 구성하기 때문에 자연히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하게 된다.

이처럼 융복합 연구가 늘면서 연구 주제 역시 과거완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도식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서진호 서울대 연구처장은 "융복합 연구는 다양한 분야 학자들이 모인 만큼 주제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장수(長壽)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의대 박상철 교수와 함께 `장수기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장수하는 사람의 특징을 기업이론에 접목하는 연구다. 조동성 교수는 "이제 학문의 흐름은 다양한 학문 간 `통섭`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기존 틀로는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보게 해주는 것이 학제 간 연구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은숙 고려대 안암병원 유방센터 교수는 바이오공학, 병리학, 종양학 등 공학과 의학을 융합해 암판별물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교수는 "공학의 미세유체역학(유체를 미세하게 다루는 기술 연구)과 의학 쪽의 아이디어를 결합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서 "융합을 하지 않았다면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합리성, 예술적 창의성을 섞어 사회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연구가 많아진 것도 특징이다.

이처럼 학제 간 연구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이유는 뭘까. 오세정 서울대 물리ㆍ천문학부 교수는 "과거에 비해 국내 학계의 수준이 부쩍 높아진 것이 한 원인"이라면서 "학과별 연구 성과가 쌓여 이제 서로 융합을 해 볼 만큼 성숙한 단계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엔 서구의 학문을 서둘러 받아들이는 게 급선무였던 만큼 학과 간 벽을 높게 쌓고 각 분야의 전문성을 높여왔지만 이젠 추격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단계에 왔다"고 말했다.

실제 연구 성과도 학제 간 융합 연구가 더 뛰어난 것으로 연구 결과 밝혀졌다. 2006년 동국대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생명화학공학 연구를 할 때 복합학제로 구성된 연구팀의 성취도가 46.174로 단일팀(44.167)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수들의 연구뿐 아니라 학생 교육 측면에서도 융복합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는 전공 간 연계성을 높인 하이브리드 핵심교양과목을 내년쯤 개설할 계획이다. 고려대 임홍빈 교양교육원장은 "사회현상이 다양한 요인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연구하려면 학문 간 융복합은 필수적"이라면서 "전공을 넘나드는 교양과목 개설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학과 출신자들을 묶어 만든 융합전공이나 애초에 학과 구분 없이 학생을 뽑는 자유전공학부도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 융합전공인 정보문화학의 경우 언론정보학, 미학, 디자인학, 컴퓨터공학, 경영학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모인 연합전공이다. 학과에서는 문화콘텐츠 산업에 대해 주로 공부를 한다. 워낙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다 보니 학과 공부를 하다가 창업에 이르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중요한 화면을 편집해 지인들과 공유하는 `소셜 북마킹`사업을 시작한 엔피커 정철 사장과 차경민 이사도 정보문화학을 공부했다.

학제 간 통합을 주도하고 있는 손동현 성균관대학 교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의 내용, 창출 방식, 유통 방식까지 모두 달라졌다"면서 "이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기초교양교육에 전공을 연결시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줘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이재화 기자 / 이기창 기자 / 정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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