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들의 글로벌싱글인스턴스(GSI)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이 잇따라 가동되면서 ERP 구축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후속 IT전략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앞서 GSI ERP를 구축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신시스템 가동과 함께 공급망관리(SCM), 제품수명주기관리(PLM) 등 후속 IT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GSI ERP를 구축하면서 새로 정립한 표준 프로세스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사 프로세스를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새로 구축한 GSI ERP 시스템이 과거 ERP 시스템에 비해 방대하다 보니 신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새로운 기술 능력과 위험관리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 GSI ERP 투자 효과를 극대화하자
글로벌 ERP 구축 이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후속 투자는 각 기업의 비즈니스 이슈와 업태에 따라 약간 상이하다.
GSI ERP를 구축한 기업들이 후속 투자로 가장 많이 꼽는 것은 SCM 시스템이다. 기존에는 각기 나뉘어 집계되던 ERP 시스템의 재고·물류·구매 정보 등을 집계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이를 생산계획, 물동계획 등과 연계해 실시간으로 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대표적 예다. 올 초 GSI ERP를 공식 가동한 삼성전자는 생산에서 구매까지 공급망 전반에 걸친 SCM 고도화 프로젝트를 곧 시작한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GSI ERP 구축 작업이 막바지일 때 PLM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올 하반기 GSI ERP 시스템을 가동할 예정인 LG전자는 후속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로 유통업체 및 협력업체들과 정보를 연계하고 협업을 강화할 수 있는 SCM 프로젝트를 꼽고 있다. 올 초 GSI ERP 시스템을 오픈한 현대상선도 차기 프로젝트로 SCM, 고객관계관리(CRM)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개발 역량 강화를 중요시하는 제조업체들은 연구개발 프로세스와 구매·생산 프로세스를 연계하는 것을 골자로 한 PLM 시스템 구축 작업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또 PLM 시스템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프로젝트 관리 정보와 자재명세서(BOM) 정보 등을 ERP 시스템의 생산 및 구매 정보 등과 연계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ERP 후속 과제로 올해 PLM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이와 같은 프로세스 연계를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올 상반기에 ERP 구축을 완료할 계획인 두산인프라코어도 후속으로 PLM 프로젝트에 착수할 계획이다. 현재 ERP 구축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와 올 초 GSI ERP를 가동한 만도 역시 올해 중점 프로젝트 중 하나로 PLM 시스템 구축을 꼽고 있다.
소비재 및 유통기업의 경우 글로벌 ERP 구축 후 CRM 인프라 정비에 적극 나서고 있다. ERP의 영업 및 매출 정보 등을 활용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고객관리 및 마케팅 프로모션 등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올 초 이탈리아법인을 마지막으로 글로벌 ERP 확산 작업을 마친 제일모직 의류부문은 곧이어 CRM 프로젝트에 착수했으며, 롯데홈쇼핑은 ERP 구축이 완료되는 올 10월 이후 안정화를 거쳐 내년 초 CRM 시스템 구축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 지난해 글로벌 ERP 구축과 본사 및 해외 통합 업그레이드를 진행한 아모레퍼시픽도 통합 CRM 프로젝트를 추진해 모든 브랜드의 고객 관리 DB와 분석을 통합해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올 초 통합 PLM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통합 ERP를 통해 ‘깨끗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게 된 만큼 이를 기반으로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비즈니스인텔리전스(BI) 시스템 구축 작업이 활발한 이유다. LG전자는 제품 생산 및 물동 등 각 영역의 의사결정자들이 업무에 필요한 글로벌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마이 윈도’ 개발에 나서고 있으며, 글로벌 ERP 등을 통해 글로벌 재고 집계 등이 가능해진 만큼 이를 의사결정의 데이터로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해 ERP 통합 작업을 끝낸 아모레퍼시픽은 올해 비즈니스웨어하우스(BW) 구축과 함께 BI 시스템 구축을 시작했다.
제일모직은 글로벌 ERP 확산 작업 이후 의사결정을 위한 대시보드를 설치하고 필요한 데이터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BI 시스템 고도화를 진행하고 있다. 또 올해 ERP 버전 업그레이드를 추진하고 있는 서울우유도 EIS 재구축을 계획하고 있다.
#2. 글로벌 통합 환경에 걸맞은 IT 운용체계 확보해야
GSI ERP를 구축하면 해외법인의 시스템 개발과 운용까지 국내에서 지원하는 체계로 바뀌게 된다. 한국 본사에 근무하는 IT인력들의 역할과 책임에도 큰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변화는 24시간 전 세계 조직을 지원하는 본사 전담조직을 운영하는 것이다. 올 초 GSI ERP를 가동한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은 GSI ERP 가동과 함께 24시간 전 세계를 지원하기 위한 ‘글로벌 서비스 데스크’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전 세계 어디라도 언제든 연락이 오면 본사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로 바뀌었다”면서 “비상시에 대비한 연락체계도 만드는 등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 야근자를 최소화하면서도 24시간 지원이 가능한 체계를 갖췄다”고 말했다. 삼성전기는 ‘글로벌 템플릿’ 형태의 표준 플랫폼을 만들어 해외 현지의 시스템 개발 요구에 대해 본사에서 이를 심사해 대응해 나갈 예정이다. 앞으로 해외 현지 IT인력이 20% 이상 줄어들 것으로 회사 측은 예상하고 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해외 IT인력의 역할은 변화관리와 프로세스 혁신 등으로 바뀌고 모든 개발과 운영은 본사에서 맡게 됐다. LG전자는 24시간 GSI ERP 시스템 운영을 위해 전 세계를 시차별로 몇 개 권역으로 나눈 후 미국·인도 등 각 지역마다 RIC(Region Information Center)를 조직해 현지 시스템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GSI ERP 구현을 목표로 올 초부터 유럽·북미 등 지역별 ERP 통합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모비스의 본사 IT팀도 올해 들어 해외법인을 지원하기 위해 오후에 출근해 늦은 저녁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배치하는 등 교대 근무체계를 만들었다.
황순용 현대모비스 상무는 “24시간 운용체제 확립은 물론 천재지변이 일어나더라도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면서 “시스템 통합에 대한 효과를 높이면서 위험요소를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최대 고민”이라고 말했다.
특히 전 세계 120여개 법인을 통합한 GSI ERP 시스템을 올 초 가동한 삼성전자와 올 하반기 80여개 법인을 대상으로 한 GSI ERP 시스템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는 LG전자의 경우 대단위 법인 시스템을 통합한 만큼 ERP 장애에 따른 위험도 매우 크다. 지난해 3일 이상 GSI ERP 시스템이 멈추면서 전 세계 물류 및 주문, 매출 업무에 비상이 걸렸던 삼성전자 사례가 이 같은 위험성을 잘 말해준다.
GSI ERP 시스템에 문제가 생길 경우 전 세계 영업과 판매가 멈추기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공산이 크다. 과거 ERP 시스템이 분산돼 있을 때에 비해 장애 횟수는 줄었지만 장애에 대한 피해는 더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삼성전자는 GSI ERP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삼성SDS의 데이터센터를 통해 ERP 시스템이 소재한 과천, 그리고 중국과 구미에 지역 3중화 데이터센터 체계를 구현했다.
글로벌 ERP 구축을 진행하던 중 삼성전자의 장애사고를 접했던 LG전자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리스크 관리에 더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시스템이 멈춰도 수작업으로 업무가 진행될 수 있도록 제품 출하 등 8가지 주요 업무의 업무연속성계획(BCP)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한편 연 2회 장애모의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특히 LG전자는 ‘사후’ 대응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는 ‘선감지시스템’도 구축했다. 1000여개의 프로세스를 정의한 후 각종 데이터의 이상 징후를 실시간으로 관리해 ERP 시스템 운용과 프로세스 변화의 위험요소를 미리 감지해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백현근 LG전자 ERP추진실 부장은 “데이터 입력의 정확도와 프로세스 일치 여부 등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데이터 입력이 누락되거나 정해진 범위 밖의 데이터 이동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경보체제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마저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백 부장은 “한 시스템에 장애가 생기면 80여개 법인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막대한 영업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장애’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상암동에 소재한 메인 시스템이 완전히 멈췄을 때에 대비하기 위한 소규모의 대안 시스템으로서 ‘NC911 시스템(가칭)’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 ERP추진실은 올 봄 ‘NC911 시스템’을 위한 서버의 위치와 시스템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 검토 작업에 돌입했다.
올 1월 국내 GSI ERP를 가동한 삼성전기도 GSI ERP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존 서버 이중화 시스템에 더해 스토리지와 네트워크까지 모두 이중화했다. 여기에 더해 지역 이중화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해외법인을 단일 서버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각 법인 단위 재해복구 개념이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를 365일 무장애 체제로 구현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올해 해외법인 시스템 구축이 완료되면 2011년 이후 구미와 수원 데이터센터를 이용해 지역 이중화센터를 구축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올 초 국내 GSI ERP 시스템을 가동한 후 해외법입으로 이를 확산하고 있는 만도도 ERP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만도 본사에 소재한 메인 시스템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진 이중화센터 구축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박병옥 만도 상무는 “GSI ERP 구축으로 해외법인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계된 만큼 한 곳의 위기가 전 세계 시스템의 위기로 확대되는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대응력이 시급한 과제”라며 “이를 위한 지역 이중화 센터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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