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동경에 있는 히토쓰바시 대학의 이노베이션 연구센터 초청을 받아 3개월간 일본을 방문 중이다. 최근 들어 일본을 방문해 보면, 과거의 일본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한 예로 몇 년 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자제품 전문상가가 모여 있는 아키하바라에 가보면 항상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입이 딱 벌어지는 새로운 제품들이 즐비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일본 기업들의 창조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키하바라에 가보면 항상 똑같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다. 물론 새로운 디자인에 보다 좋은 성능을 가지고 보다 작은 사이즈의 신제품들이 즐비하지만, 예전의 일본 전자제품들이 주던 그런 신선한 충격을 주는 제품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때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소니, 파나소닉, 샤프와 같은 회사들은 더 이상 소비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혁신적은 제품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과거에 일궈놓은 브랜드의 명성과 원가절감을 통한 이윤향상으로 그 명맥을 근근히 이어가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 세계시장을 주도하던 일본기업들이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 기술과는 다른 속성을 가진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의 유연성과 거기에서 비롯하는 무한혁신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아날로그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디지털 혁신에 접근하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보인다. 아날로그 시대에 일본기업들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한곳에 몰두하는 장인정신이었다. 대를 이어가며 고집스럽게 라면만을 만들어 완벽한 라면의 맛을 선사하는 라면집 이야기와 같이, 과거 일본의 기업들은 특유의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완벽한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끊임없이 개선함으로 시장을 완전히 석권하는 저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러나 무한혁신으로 규정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더이상 그와 같은 맹목적인 장인정신은 기업의 장점이 될 수가 없다. 일본 기업들은 아직도 제조공정기술에서는 월등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쉬마세이키라는 기업은 3D CAD를 응용해서 이음새가 없는 옷을 만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디지털화된 디자인과 공정 데이터를 다른 디지털 모델이나 데이터와 결합함으로써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창조적인 제품을 만드는데는 별 계획이 없다고 한다. 만일 이런 기술이 인터넷의 열린 인노베이션 공간과 결합한다면 기존 의류산업의 디자인, 생산, 유통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파괴적인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회사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핵심영역은 옷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장인정신이다.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무한혁신시대에는 새로운 모습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한 우물을 파는 과거의 장인정신에서 벗어나 이제는 디지털 기술들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서 제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해 가는 새로운 장인정신으로 거듭나야한다. 디지털 시대의 길목에서 고전하는 일본 기업들의 사례를 우리기업들은 타산지석으로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유영진 템플대 경영대 교수 yxy23y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