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 <3> `최대 관심사` 장관 인사

1994년 12월 24일 김영삼 대통령과 이홍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신임 국무의원들이 개각 후 첫 국무회의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1994년 12월 24일 김영삼 대통령과 이홍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신임 국무의원들이 개각 후 첫 국무회의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1994년 12월 23일.

 김영삼(YS) 대통령이 이날 오후 정부조직개편안에 서명하자 관가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개각이었다.

 “누가 장관으로 온데….”

 “뭐 새로운 소식 들은 것 없어.”

 부처마다 누가 장관으로 올지를 놓고 점치기에 바빴다. 두 사람만 모여도 인사에 관해 귀동냥을 하려고 애를 썼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입처마다 후임자에 대해 묻고 다니느라 발바닥에 불이났다.

 청와대에서 극비 인선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언론마다 하마평이 무성했다. 김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인사는 만사”라고 말했다.

 그것은 진리였다. 어떤 경우건 사람이 일을 하고 업적을 내기 때문이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용인(用人)을 강조했다. 다산은 “사람을 잘 쓴 것이 행정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강조했다.

 부처마다 청와대를 겨냥, 정보 안테나를 총동원해 후임 장관에 대한 탐색전을 벌였다.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이른바 출처불명의 온갖 설이 눈발 날리듯 난무했다.

 정보통신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누가 올 것인가.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사는 귀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김 대통령은 인사에 관한한 일반의 예측을 불허했다. 김 대통령은 23일 밤 늦게 기습개각을 단행했다.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에는 경상현 체신부 차관이 발탁됐다. 그는 미국 MIT 공학박사로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한국전산원장 등을 역임한 과학자 출신이다. 내부는 환영 일색이었다. 외부에서 장관이 오는 것보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차관이 승진한 것이 업무 연속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경 장관의 발탁에 의외라는 반응도 없지 않았다. 개각 당일까지 경 차관은 후임 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경 장관 자신도 “입각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정치권과 별 안면이 없고 김 대통령과도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다.

 경 전 장관의 회고를 통해 그날 밤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12월 23일 저녁. 경 차관은 평소보다 늦게 집무실을 나섰다. 연말이 다가 오는데다 새 장관이 오는 것에 대비해 주변 정리를 할 게 많았다.

 당시 경 차관은 분당에 살고 있었다.

 차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판교 IC로 접어 들 무렵 카폰이 울렸다.

 전화기를 들었다.

 “경 차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여기는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유선전화가 가능한 곳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이 번호로 곧장 전화를 해 주십시오.”

 경 차관은 느닷없는 청와대 호출 전화를 받고 크게 긴장했다.

 “무슨 일이 잘못됐나. 나보고 청와대에 전화 하라고 할 일이 없는데….”

 그렇다고 윤동윤 장관에게 전화를 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일단 청와대로 전화를 한 후 문제가 있으면 윤 장관에게 보고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선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는데 도로 주변에 공중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 갔다.

 청와대에서 알려 준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릉” 두어 번 신호가 울리자 비서실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통령님 전화입니다.”

 잠시 후.

 수화기 저편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김 대통령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대통령입니다. 경 차관이 새로 출범하는 정보통신부를 맡아 주세요.”

 “예?”

 “공식 발표 전까지는 절대 보안을 유지하고….”

 김 대통령은 말을 마치자 전화를 “딸깍” 하며 끊었다.

 경 차관은 예상치 못한 입각 통보에 수화기를 손에 든 채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시 언론에는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윤동윤 장관과 오명 교통부 장관(전 체신부 장관), 김우석 건설부 장관 등이 물망에 올랐다.

 오명 교통부 장관은 이날 통합한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다시 입각했다. 그는 이번 개각에서 단연 화제가 됐다. 그는 육사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마흔의 나이에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내고 체신부 차관으로 발탁됐다. 6년 2개월이란 최장수 차관으로 재직하면서 전전자교환기(TDX) 개발과 전화 자동화사업, 4메가 D램 개발 등 한국정보통신 혁명의 기틀을 다졌다.

 이어 체신부 장관 등을 거치며 체신부에서만 8년여 일했다. 그는 역대 정부마다 빠짐없이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장관 롤모델이란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그는 ‘직업이 장관’이란 소리를 들었다. 공무원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관, 성공한 장관으로 손꼽힌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서 과기부총리를 거쳐 현재는 건국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보자.

 경 장관의 계속되는 증언.

 “나는 차관을 그만두면 학교나 연구소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체신부엔 윤 장관의 유임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정통부 출범의 산파역을 했고 정치력이나 리더십, 업무 추진력과 통합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이에 대해 윤 전 장관은 “나는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내부에서는 그런 기대를 했는지 모르나 당시 상공, 과기처 장관 등이 다 물러났어요. 2년여 장관으로 일했는데 뭘 더…”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인사를 단행할 때 상대에게 “인사 기밀이 새면 취소하겠다”거나 “아내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보안 유지를 각별히 당부했다.

 김 대통령의 인사와 관련한 대표적인 일화.

 대법원장으로 윤관씨가 내정됐다. 김 대통령은 윤씨에게 내정을 통보하면서 “기밀이 새어 나가면 내정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언론사마다 사법부 수장 인선에 대해 열띤 취재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윤 내정자의 아들이 모 유력 언론사 기자였다. 해당 언론사는 윤 내정자 아들에게 부친인 윤씨에 대한 인사 취재를 맡겼다. 분가해 살던 아들은 낮에는 아내를 시댁으로 보내고 저녁에는 자신이 부모집으로 달려가 밀착취재를 했다. 기자로서 특종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들이 전혀 낌새를 알아 차리지 못한 가운데 윤관씨의 인사가 발표됐다. 윤씨의 아들은 특종을 놓치고 말았다. 회사에서 “뭘 했느냐”는 부장의 엄한 질책을 받았다.

 사정을 알아본즉 청와대에서 통보를 받자 윤씨는 며느리를 불러 놓고 “이 사실을 네 남편에게 알리면 나는 사법부의 수장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가문의 명예를 잃게 되는 일이니 네가 깊이 생각해서 잘 처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심하던 윤씨의 며느리가 남편에게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아들은 특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윤씨의 며느리는 이런 자초지종을 사보에 기고했다고 한다.

 황영하 총무처 장관도 자신의 입각을 방송을 듣고 안 경우다.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1993년 12월 23일 오후 3시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었다. 199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남측 대표였던 정원식 국무총리를 수행한 이동복 전 안기부장 특보가 이른바 훈령조작사건으로 감사원의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논란이 돼 감사원이 조사 내용을 이날 오후 3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는 집무실에서 기자발표문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2시 뉴스에 자신이 총무처 장관으로 발탁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뜻밖의 입각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황당하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 입각사실을 알았으니 그럴법도 했다.

 김 대통령은 인사 내용이 사전에 언론에 흘러나가면 즉시 인사를 취소시켰다.

 실제 정치권 모 인사는 내무부 장관 내정을 통보받고 이를 자랑삼아 친한 기자에게 말했다가 이튿날 ‘모 부처 장관에 모씨 유력’이란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입소문을 타고 바람처럼 번졌다. 그래서 인사철이 되면 별별 백태가 다 벌어졌다. 집을 비우는 사람, 전화선을 뽑는 사람 등. 그런가 하면 목을 매고 청와대에서 전화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았다.

 경 장관은 입각 사실을 부인게게 알리지 못했다. 김 대통령의 당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화가인 부인이 그날 밤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늦게 귀가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에 배달돼 온 신문을 보니 개각 기사가 각 면을 장식했다.

 경 장관의 말.

 “저는 새벽 4시반 경이면 일어납니다. 아침 신문을 보니 개각 기사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어요. 제 입각 기사에 둥그렇게 표시를 해 탁자에 올려 놓고 출근했습니다.”

 경 장관은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임명장을 받기 위해 곧장 청와대로 떠났다.

 김 대통령은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이홍구 국무총리 등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 첫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김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새 각오로 21세기를 준비하자고 강조했다.

 “새 내각의 첫째 임무는 세계화 추진입니다. 제도나 의식 관행 등의 개혁을 통해 모든 분야를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나라와 국민의 경쟁력을 높이며 21세기를 준비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김 대통령은 이어 “내각은 공직사회의 안정과 활력을 회복하고 부처이기주의라는 말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본관 앞에서 국무의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경 장관의 회고.

 “특별히 정보통신부에 대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정보통신부로 돌아와 장관 이취임식을 했습니다.”

 윤동윤 장관의 이임식에 경 장관은 차관 자격으로 참석했다. 윤 장관은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유일하게 장관까지 올랐고 ‘정보통신업계의 대부’ ‘성공한 장관’이란 평가를 받았다. 경 장관은 청사를 떠나는 윤 장관을 긴 인연의 아쉬움을 달래며 배웅했다.

 그는 잠시 후 취임식을 갖고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첫 행사는 정보통신부 현판식이었다. 한글로 쓴 ‘정보통신부’란 현판을 단 후 이계철 기획관리실장,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 등과 기념촬영을 했다.

 정보통신부는 이날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정보통신부는 경사가 잇따랐다. 경 차관의 장관 발탁에 이어 26일 단행한 차관 인사에서 이계철 기획관리실장이 내부 승진한 것이다.

 이 차관은 행시 5회로 체신부 총무과장, 경북체신청장, 전파관리국장, 체신금융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부내 요직을 모두 역임했다.

 경 장관의 말.

 “차관 인사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계철 차관에 대해 의견을 묻기에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체신부 요직을 다 거쳐 업무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가장 적임자였습니다.”

 1994년 12월은 정보통신부에게 축제의 달이나 다름 없었다.

 이현덕 IT칼럼리스트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