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6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잡지 ‘과학조선’이 탄생했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과학조선은 김용관·박길용·현득영 등 한국과학 대중화의 선구자들이 중심이 돼 1932년 본격 활동을 재개한 발명학회의 기관지다. 발명가를 비롯해 학생, 일반시민들까지 널리 과학지식을 보급하고 발명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취지로 창간했다.
내용은 지금의 관점으로 봐도 꽤나 풍성했다. 이화학연구소의 설립 등과 같이 발명학회의 주요 사업 홍보를 비롯해 특허제도·발명사례 소개 등 최신 과학 정보도 포함됐으며 정보의 범위는 공학 중심의 전문과학지식에서 일반 독자를 위한 과학상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집필진은 대부분 발명학회의 임원과 발기인이었으며 안동혁 당시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수와 미국에서 공학을 공부한 최항 박사를 비롯해 교육계·경제계·법조계 등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대중과학잡지의 창간까지는 19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선의 과학운동 역사가 있다. 자강운동이 한창이던 1908년 공업전습소 학생들이 ‘공업연구회’를 조직한 것이 조선 과학운동의 시작이었다. 경성공업고등학교가 설립되자 초기 졸업생들은 공업연구회를 계승해 ‘공우구락부’라는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김용관은 1924년 이러한 전통 위에서 발명학회를 설립한다.
그 해 10월 초 동양염직주식회사 건물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박길용 초대 이사장이 선출된다. 김용관은 전무이사를 맡고 이인 변호사, 류전 공학사가 고문을 맡았다.
과학조선은 이러한 발명학회 결성자들의 “공업지식 보급을 통해 발명정신의 향상을 도모해야 우리 민족이 경쟁력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창간됐다. 지금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조언이다.
과학조선은 1934년 6월까지 발간되었다가 임시휴간 됐고, 1935년 2월 발명학회의 후신인 과학지식보급회의 기관지로 속간됐다. 그 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광복을 1년 7개월 앞둔 1944년 1월 종간됐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kr·자료협조=국립과천과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