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적부터 인류 역사 속에서 매우 반복적으로 나타난 패턴이자 매력적인 가치로 각인돼 있는 내러티브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강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한 연합이다. 서로의 이견은 유보해두고, 우선 힘을 합쳐서 모두를 집어삼킬 강한 적을 물리치는 모습이다. 맘모스를 사냥하던 원시인들도, 페르시아에 맞선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세계대전의 연합군도, 한국 현대사 속 수차례 반복된 반독재 시위대도, 보다 안정적인 상황에서는 정당간 정치연합도 그렇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는 대개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뭉치기 위한 이견 유보를 남용하고자 하는 유혹 또한 넘친다. 이견을 서로 조율하고 합의해서 모두에게 최적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복잡한 방식을 거치기보다는, 그런 과정을 생략했는데도 사람들이 대충 따라오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강대한 공통의 적에게 승리해야한다는 당위를 극대화하면 된다.
경제 불평등이 주는 사회적 분열을 해결하지 않고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국제경쟁에서 한국이 진다는 위기감이 최고고 덤으로 파이론을 동원하면 끝이다. 최소한 70년대부터 현재까지 계속 통용되고 있다. 혹은 여러 정치적 비전을 가진 정당들이 정책연대와 후보 배분 같은 섬세한 정치적 거래에 실패했는데도 연합의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이탈자는 적을 물리친다는 대의를 배신한 이적행위자로 몰아가면 된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작은 스케일의 파시즘이 아니라 큰 정의의 구현이라는 자기만족감까지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떤 공동의 큰 적이 실제로 존재할 때가 적지 않지만,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하나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이라크’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실제 이라크를 폭격해 미국 국내갈등을 봉합해둔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 정부를 상기해보라. ‘공동의 강대한 적’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효과 만발의 꼼수다.
미소 냉전이 더욱 심해진 가상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걸작 슈퍼히어로 만화 ‘왓치맨(Watchmen)’은 이런 역사적 패턴을 극단까지 몰고 가는 설정의 작품이다. 냉전의 논리 자체가 강대한 적을 두고 서로 자기 진영 내부의 갈등을 덮어버리는 것인데, 문제는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사회 전반이 속으로 곪아 들어간다. 종말론적 불안심리, 크고 작은 폭력, 갈등을 원활하게 해결할 능력이 안 되는 사회 시스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모습 속에 인류가 멸망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스스로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인간을 굽어 살피고자 하는 박애정신 넘치는 정의의 슈퍼히어로가 공동의 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에 착안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수수께끼의 적을 가공하여 수백만명을 단번에 죽인 결과 나머지 인류가 하나가 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파시즘이 기다리고 있다.
이왕 역사적 교훈을 따지려면, 끝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공동의 적을 내세워 갈등을 덮어버린 사회는 승리하든 거짓이 드러나든 공동의 적이 없어지는 그 순간, 그간 미루어두었던 모든 갈등이 폭발해왔다. 그 사회의 멸망을 피하는 방법은 더 강력한 공동의 적을 빨리 생각해내서 또 갈등을 덮거나, 힘들더라도 갈등을 직면하고 조율하는 방식들을 개선시켜 나가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어느 쪽이 덜 미친 짓인지는 비교적 명확하지 않을까 한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capcolds@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