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운기자의 백투더퓨쳐]<17> 1566년 7월 2일

  2012년 지구 종말론이 퍼지고 있다. 1999년 종말론이 나왔을 때만큼 들끓지는 않지만 여기저기서 꽤 그럴싸한 종말론의 근거를 들이댄다.

  노스트라다무스. 10년 주기로 종말론이 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노스트라다무스는 마치 신비주의에 빠진 점성술가나 예언가처럼 각인돼 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제세기(The Prophecies)’ 때문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프랑스 대혁명, 아폴로호의 달 착륙, 9·11 테러와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 책 속에 모두 예견돼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가 남긴 1000여개의 예언 중 일부만 맞았을 뿐 대다수는 틀렸고, 모든 글이 4행시로 남겨져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끼워 맞춰 해석을 했다는 비판도 많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신봉하는 심리의 밑바닥에는 시대적 불안과 개인적 고통이 깔려 있다. 프랑스 국왕이던 앙리 2세가 그의 예언시를 읽고 왕가의 운세 판단을 맡겼다. 자신의 사망과 가문을 예언한 글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999년 종말론 역시 시대적 불안을 타고 크게 확산됐다. 1973년 일본의 르포 작가인 고토 벤은 ‘노스트라다무스 대예언’이란 책을 출간한다. 당시 일본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기는 침체됐고, 고속 개발의 부작용으로 환경오염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으며, 종말론은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을 타고 수백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566년 7월 2일은 노스트라다무스가 63세로 생을 마감한 날이다. 그의 무덤에는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생전의 노스트라다무스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예언가가 아니라 의술가, 천문학자로서 더 많은 세월을 살았지만 유대인으로서, 당시 기독교의 권위주의에 반기를 든 학자로서 고단하고 곤란한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유럽 전역을 돌며 풍토병과 페스트 치료에 나섰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페스트로 잃은 아픔도 있다.

  저승에서 편히 쉬겠다는 그의 바람과 달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를 깨워 숱한 억지 예언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시를 썼지만 자신의 삶은 예언에 기대지 않고, 의지대로 살았다는 점이다. 그가 후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세상이 끝났으니 두 손 놓고 있으라’가 아니라 ‘위험이 오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가 아니었을까.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