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매일유업은 창사 이래 최초로 고객관계관리(CRM)실을 만들었다. 당시는 유통업체들이 PB상품 등을 통해 제조업 분야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던 시기였다. 제조업체와 달리 ‘구매 고객’에 대한 데이터와 지식을 갖춘 유통업체들이 시장 영향력을 강화하면 제조기업들은 한낱 PB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매일유업은 ‘CRM에서 해답을 찾자’며 벤치마킹에 나섰다. 한상철 CRM 부문장은 “제품 구매자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B2C 제조기업들은 금융, 통신, 유통업계와 달리 CRM에 대한 개념이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고객 서비스는 단지 콜센터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을 만큼 고객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관리한 사례가 드물고 정확한 고객관계관리 매커니즘도 없었다는 것이다. 콜센터마저도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매일유업은 제조기업으로서 CRM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사적인 기획과 실행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창안해냈고, 이러한 활동 덕분인지 40여년 만에 분유 매출 정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CRM 전문가 김영걸 카이스트 교수는 매일유업의 CRM 프로젝트에 대해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 좋은 일에 공헌하고 지인에게 선물을 하면서 감성이 전해지는 프로그램으로 고객의 라이프사이클에 걸친 진정한 CRM 활동”이라고 평가했다.
◇CRM은 IT가 아니라 고객 중심 프로세스=분유 시장에서 약 4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던 매일유업은 자사가 보유한 분유 고객 정보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다른 제조기업과 달리 타깃 고객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우선 임산부는 잠재고객, 산모는 고객이 되니 주요 제품의 고객층이 뚜렷한 점, 그리고 이 타깃 고객을 기반으로 매일유업의 여러 유음료와 주스 음료들을 연속선상에서 판매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했다. 매일유업의 많은 분유 소비자들이 매일유업의 다른 제품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유업은 분유를 구입한 고객이 이어서 야쿠르트, 또 우유와 치즈까지 구매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새로운 고객 확보만이 매출 증대로 이어진다는 생각부터 바꿨다. 기존 고객의 마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 부문장은 “입력된 데이터를 기준으로 일률적인 마케팅을 하고 이에 노출된 대중 가운데 일부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시스템 투자형 CRM이 아닌, 소중한 몇 몇 고객의 마음을 붙드는 것을 시작으로 진심어린 ‘고객 관계’ 형성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과거 IT업체에 근무할 때 많은 기업들의 CRM 실패사례를 목격한 한 부문장은 “시스템을 우선시하다 보면 근간을 이루는 정성적 부분을 놓친 채 데이터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며 “우리는 IT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경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CRM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고민한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유업은 CRM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지 3년이 지난 올 하반기 이후에야 데이터웨어하우스(DW), 온라인분석툴(OLAP) 등 시스템 도입을 검토할 계획이다.
◇마음을 전하는 ‘고객 관계 관리’=매일유업은 기존 금융, 백화점 등에서 하듯 매출 순위에 따른 고객 분류는 지양하기로 했다. 대신 예비엄마 교실, 임신 육아 포털 등 각기 따로 운영하던 고객 대상 마케팅 프로그램을 하나로 모으고 온오프라인을 통틀어 매일유업이 가진 모든 고객 DB를 하나로 모았다. 이후 콜센터로 전화해 불만을 털어놓는 고객들, 그리고 매일유업의 온라인 및 오프라인 행사에 자주 참여하는 고객들 등 매일유업에 관심을 갖는 고객을 분류해낸 후 이들의 ‘로열티’를 확보하기 위한 차별화된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들이 매일유업의 신제품을 한 상자 가득 선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냉장 제품을 배송할 때는 대표이사의 감사 편지까지 동봉했다.
모든 제품 사이트와 온라인 기획은 CRM 부문에서 관리하도록 한 데 이어 2008년 분유 마일리지 멤버십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마일리지 포인트로 매일유업의 모든 제품과 자회사 제품까지 판매하는 홈페이지 쇼핑몰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또 마일리지를 기프티콘과 맞바꿔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 음료를 선물하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국제기아대책본부, 세이브더칠드런 등 아이들을 보호하는 국제적 NGO들과의 제휴를 통해 이 포인트로 기부 활동까지 할 수 있게 했다. 아이티 지진 당시에도 현지 아이들을 돕기 위한 이벤트가 공개되자마자 삽시간에 수백만원어치의 포인트가 모이기도 했다.
한 부문장은 “고객들은 ‘내가 매일유업을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고 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돼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더라”며 “많은 고객들이 매일유업과의 심리적 교감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마일리지 제도를 통해 회원 정보와 구매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세분화된 마케팅 전략이 가능해진 것도 부가 효과다.
◇고객의 라이프사이클에 맞춰 CRM 협업=매일유업은 더 나아가 최근에는 국내 1위 보험사, 1위 교육업체, 1위 리조트 업체 등과 전략 제휴를 통한 CRM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소비자들에게는 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출산을 마친 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이 교육인 만큼 매일유업이 부모들과의 행사에 좋은 교육 콘텐츠를 소개하는 것이다. 또 평균적으로 2~5세 아동을 둔 부모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리조트 기업의 경우에도 매일유업과의 협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매일유업과 협력업체간 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단기적 매출 향상을 이유로 추진하는 1회성 협업 이벤트와는 차별화된다. 동일한 고객군을 가지고 있는 이업종 간 협력으로 고객을 장악하는 ‘CRLC(Customer Resource Life-cycle)’ 이론을 CRM과 접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부터 제휴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매일유업은 하반기부터 통신 등 더 다양한 이업종 기업들과의 협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한 부문장은 “한 기업의 노력으로는 많은 고객들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며 “결과적으로 고객에게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기업들끼리 협업한다면 새로운 윈윈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