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O BIZ+]금융그룹 통합 리스크관리 도입 활기

 국내 A금융그룹의 한 자회사는 지난 2008년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해외 파트너를 통해 리먼브러더스의 위기를 사전에 인지했다. 이 회사는 곧장 리먼브러더스와 거래를 일시적으로중단했다. 하지만 같은 금융그룹의 또 다른 자회사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엄청난 부실을 떠안아야 했다. 그룹 차원에서 리스크 정보가 공유됐더라면 부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내 금융기업들이 기존 리스크 관리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게 된 중요한 계기다. 금융 환경의 급격한 변화도 리스크 관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든 요인이다. 무분별한 자산 확대 경쟁 속에서 리스크 관리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해외 차입에 과도하게 의존하다보니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여파로 유동성 위기까지 맞게 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 남유럽의 재정 위기까지 겪게 되면서 국내 금융기업들은 한층 더 강화된 리스크 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자회사별 리스크 관리가 아닌 금융그룹 차원의 통합 리스크 관리로 위기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최근 1∼2년새 국내 금융지주사들은 자회사를 포함한 전 그룹의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관리 능력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관련 조직을 강화하는가 하면, 지주사 중심의 중앙집중형 리스크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나금융지주가 차세대시스템 구축사업을 추진하면서 금융그룹 차원의 전사 리스크관리시스템을 국내 처음으로 구축한데 이어 최근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등이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그룹 차원의 통합 리스크 관리는 일반적인 기업집단(그룹)의 공통 업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단 그룹 차원에서 동일한 기준의 리스크 평가 기준을 마련하면서 계열사별 특수성도 동시에 반영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룹 통합 리스크 관리가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련 프로세스와 함께 조직 및 지배구조도 대대적으로 개편돼야 한다.

 국내에서 이 같은 운영 사례를 찾기 힘들고 관련 솔루션도 전무하다는 점이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금융지주사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는 데 있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그룹 차원 전사 리스크관리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그룹 차원의 일관된 리스크 관리 필요성 대두=글로벌 금융 위기 같은 파괴력 있는 리스크 정보를 사전에 인지했더라도 이를 금융그룹 차원에서 인지하지 못한다면 금융그룹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대응할 수 없다. 결국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특정 계열사에서 위기가 발생한다면 이는 금융그룹 전체로 확산될 수도 있다.

 금융업종간 벽을 허무는 자본시장법 시행도 그룹 차원의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고 있다. 그룹 차원의 통합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각 계열사마다 리스크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고객을 놓고도 전혀 다른 리스크 평가가 이뤄진다. 예를 들면 은행·증권·보험사 등에서 대출 가능 여부에 대한 자격을 심사할 때 같은 고객이라도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박상순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파트너는 “그동안 같은 금융그룹의 계열사일지라도 각 사마다 리스크 관리를 다르게 해왔기 때문에 리스크 관리의 일관성이 없었다”면서 “그룹 내부적으로 동일한 기준으로 리스크를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룹 차원의 전사 리스크 관리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평가 기준이 다르다보니 금융지주사 차원에서 각 계열사의 사업에 대한 성과 관리를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동일한 손익이 발생했더라도 감수한 리스크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성과는 리스크 대비 손익으로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동일한 잣대에 의한 리스크 평가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리스크를 감안한 성과 관리에서 형평성 이슈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그룹의 계열사들은 사별로 리스크 관리 수준의 편차도 크다. 이에 금융지주사들은 상대적으로 리스크 관리체계가 잘 갖춰진 은행의 리스크 관리체계를 그룹 차원으로 확장하는 방식을 통해 그룹의 리스크 관리 수준을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이 이 같은 방법을 택했다. 하나금융그룹은 하나은행의 리스크 관리를 기준으로 전 계열사에 확대 적용하는 방식으로 전사 리스크 관리체계를 구축했다.

 한 금융전문가는 “리스크 관리는 일반적으로 인프라 측면에서나 기업의 노하우 차원에서나 규모의 경제가 존재하는 영역”이라며 “통상 금융그룹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은행의 경우 바젤Ⅱ 등을 도입하면서 리스크 관리 방법론이 상대적으로 고도화돼 있기 때문에 이를 그룹 차원에서 공유한다면 나머지 계열사들의 리스크 역량을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신한·우리금융그룹이 주도=국내에서는 하나금융그룹, 신한금융그룹, 우리금융그룹 등이 그룹 차원의 통합 리스크 관리체계 마련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제일 먼저 그룹 차원 리스크 관리에 나선 하나금융지주는 하나은행의 리스크관리시스템과 기준들을 전 계열사에 확대 적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나은행의 차세대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금융지주 차원의 통합 리스크관리시스템도 함께 구축했다.

 이어 신한금융지주가 2009년 상반기에 BCG와 함께 그룹 차원의 전사 리스크 관리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전사 차원의 리스크 관리체계 업그레이드를 위한 전략을 수립한 후 지난해 말까지 컨설팅을 통해 수립된 결과를 바탕으로 이행 작업을 준비했다. 첫 단계로 지주사에 리스크 관리를 전담할 그룹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 직제를 도입하고 그룹 리스크 관리팀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리스크관리를 위한 그룹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자회사별로 분야별 개선 목표를 제출하게 하고 지주사에서 실태 및 개선 여부를 평가해 자회사 전체 평가에 반영하게 했다. 관련 전사 리스크관리시스템 구축 작업이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2011년 말까지 이를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신한금융지주 관계자는 “주로 거래 상대방의 채무불이행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하는 신용리스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면서 “그룹 차원에서 리스크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영진의 입장에서 비즈니스에 적용할 수 있는 보다 유용한 리스크 정보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금융지주도 액센츄어와 삼정KPMG를 통해 컨설팅 작업을 진행했으며, 지난 5월부터 전사 통합 리스크관리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우리금융그룹은 그동안 부채담보부증권 등 파생상품 투자 분야에서 지주사와 자회사의 평판 리스크가 높아지면서 그룹 차원의 리스크 관리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우리금융그룹은 리스크 유형별로 구축된 시스템을 그룹 전체로 통합된 시스템으로 만들어 확대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이 외에도 우리금융그룹은 리스크 관리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그룹의 리스크 지표를 통합해 보여주는 대시보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주기적으로 계열사 실태를 점검하거나 그룹 통합 스트레스 테스트 등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산은금융지주, KB금융지주 등은 아직 구체적으로 리스크 관리체계를 그룹 차원에서 어떤 로드맵으로 진행할지 확정하진 않았지만 올해 준비작업을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정민 산은금융지주 리스크관리실장은 “최근 들어 금융감독기관에서도 그룹 차원에서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상황”이라며 “이에 따라 현황을 제대로 파악해서 내년부터는 실질적인 그룹 차원 리스크 관리전략이 나올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은철 SAS코리아 리스크인텔리전스팀 이사는 “현재 지주사의 리스크 관리체계 정비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올 상반기 이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금융그룹 차원의 통합 리스크관리시스템 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통제 프로세스, 데이터 통합 등 과제 많아=금융지주사들이 그룹 차원의 리스크 관리체계 구축에 나서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이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일 먼저 계열사마다 리스크 관리 모델이 다르기 때문에 이 모델을 통합하는 방법 자체가 간단하지가 않다. 그룹 차원에서 통합한다고 해서 계열사별로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도 힘들다. 은행·증권·보험 등 사업 형태에 따라 리스크 관리체계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계열사별 특수성도 일부분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합성과 특수성 간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복잡할 뿐만 아니라 쉽지 않은 과제인 것이다.

 박상순 파트너는 “그룹 차원에서 모범 기준을 만들어 각 계열사들이 이 기준 하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완전한 자유가 아닌 그룹 가이드라인을 통해 자회사들의 리스크 관리가 그룹 내에서 일관된 접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신용리스크 분야의 경우 리스크 평가모델을 통합하는 방안이 다소 쉬운 편이지만 주가 또는 금리·환율 등 금융 시장의 가격 변동으로 인한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장리스크의 경우에는 계열사의 모든 거래정보에 대한 데이터가 통합돼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그룹 차원의 통합 리스크 관리에 나설 경우 통합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보다 리스크 관리 기준과 프로세스 등을 더 세심하게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룹 차원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계열사들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 1순위라는 것이다. 또 이상징후가 발생할 경우 그룹 차원에서 각 계열사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통제 프로세스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통제 프로세스가 마련된 후에 시스템 구축 작업을 추진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시스템 구축 측면에서는 무엇보다도 데이터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리스크 관리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계열사별로 리스크 관련 데이터의 품질 수준이 다르고, 사용하는 리스크 관리 솔루션도 제각각인 만큼 이를 표준화·통합화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김은철 이사는 “시스템을 구축할 때 각 계열사의 리스크 데이터를 그룹 차원에서 어떻게 통합할지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야 한다”면서 “이와 함께 그룹사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는 보고 체계까지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동시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전문가들은 금융기업들이 리스크 관리 문화를 전사적으로 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이를 통해 실제 비즈니스 의사결정에 리스크 분석 결과가 항상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상순 파트너는 “너무 시스템에만 의존하다 보면 오히려 비즈니스 의사결정과는 동떨어질 수 있다”며 “리스크 관리 모델의 정교화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 이런 변화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조직 내 공감대를 형성하고 의사결정권자들이 스스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오너십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