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받고 싶다면 기초연구를 강화하고 지식의 최전선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독일 헬름홀츠연구회의 위르겐 믈리네크 이사장은 실용성과 기초과학을 융합할 때 “조급해하지 말고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지원기관인 헬름홀츠연구회는 인페터 그륀베르크(2007년 물리학)와 하랄트 추어하우젠(2008년 생리의학) 등 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처럼 선진국 과학기관이 강조하는 것은 기초과학의 중요성과 눈앞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투자다.
기초과학은 혁신적인 기술이 나올 때까지 수십년이 걸리지만 국부를 창출한다. 레이저, 트랜지스터, 자기공명영상(MRI), 인터넷 등 혁신적인 개발은 오랜 기간 기초연구를 통해 나왔다.
◇연구개발 투자 꾸준히 증가=우리나라는 2007년 기준 국내 국가총연구개발비가 31조원을 넘어서 미국(369조원), 일본(149조원), 독일(84조원) 등과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그래도 국가 경제 규모 면에서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국민총생산(GDP) 대비 3.47%로 스웨덴(3.67%) 등과 더불어 높은 연구개발비의 투자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 확대로 인해 2008년 SCI 기준 한국의 발표논문 수는 3만5569편(세계 12위)으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기초과학은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기초과학을 소홀히 하는 나라는 장기적으로 국제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가 토대가 되어야 그 나라의 기술 혁신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휴대폰 등 산업적으로 유용한 응용과학을 발전시킬 수 없다. 기술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기술에만 의존해서는 끊임없는 성장을 이어갈 수 없다.
◇아직 낮은 기초과학 수준=아직 우리나라 기초과학은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SCI 발표논문 수가 세계 12위이긴 하지만 재료과학, 컴퓨터과학 등 공학 분야의 논문 수에서 10위권 내에 포함되어 있을 뿐, 물리를 제외한 기초과학 학문 분야는 순위가 10위권 밖이다.
더욱이 논문 1편당 피인용 횟수가 3.28회로 세계 30위고, 특허출원 시 자국 과학문헌의 참조비율이 9% 수준으로 50% 이상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SCI 고피인용 연구자 5000여명 중 한국인 연구자는 단 12명(국내 4명, 국외 8명)에 불과하다. 이는 양적으론 성장을 했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다.
국가 경쟁력과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초 원천기술 확보가 관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90개 중점 과학기술 수준 평가에서 세계 최고 기술 보유가 미국 270개, 일본 34개인 데 비해 우리는 전무하고 CDMA 원천기술 로열티도 1995년부터 10년간 3조원이나 외국에 지불했다.
◇기초과학에 승부건다=현 정부에서도 기초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2년까지 국민총생산(GDP)의 5%를 국가연구개발비에 투자하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 중 기초연구 비중을 50%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김중현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은 “이제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디스플레이·조선·반도체 등에서 1등을 하고 있고, 과거와 같은 추격형 모델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며 “창의적인 연구, 우리만의 기초 원천 연구에 대한 연구력 집중과 연구비 배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기초과학분야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창의연구사업과 중견연구자 지원사업(도약연구) 등에서 결실을 얻고 있다.
창의연구사업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의적 지식을 가진 차세대 연구자를 발굴해 세계 수준의 연구 리더로 양성하는 교과부의 대표적 사업이다. 매년 5억~8억원을 최장 9년까지 지원한다. 최근 국가과학자로 선정된 노태원·김빛내리 서울대 교수 등도 창의연구사업단장을 지낸 바 있어 스타과학자의 산실로도 불린다.
도약연구는 1999년 국가연구실(NRL)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우수 중견연구자 양성을 위해 시작됐다. 1년에 3억~5억원을 최장 5년까지 지원하며 국내 대표적 기초 R&D 지원사업으로 뿌리내렸다.
이 두 지원사업이 창출한 연구 업적은 탁월하다. 2002~2008년에 발표된 SCI 논문 수는 도약연구가 1만23건이고 창의연구가 3524건이다. 같은 기간 등록된 지식재산권의 수도 도약연구가 2338건, 창의 연구가 353건이다.
각 대학과 연구기관들도 기초 R&D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이공계 기피와 고급 두뇌 유출현상으로 여건은 좋지 않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초R&D에 매진하고 있는 연구실의 불빛은 밤새 환하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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