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예산 200억원이 투입되는 국가 슈퍼컴퓨터가 해외 공급사의 늑장 대응으로 반년 이상 놀고 있다. 국가 슈퍼컴퓨터를 대학과 중소기업에 개방해 과학기술 경쟁력을 높인다는 계획도 표류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슈퍼컴 4호기 2차 시스템을 설치하고도 안정성 테스트 등을 진행하지 못해 서비스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올 초 부품 결함으로 한 차례 지연된 데 이어 최근에는 공급업체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내부 사정으로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본지 3월 18일자 9면 참조
지난해 9월 장비 반입을 시작한 후 4개월 만인 올 1월 검수를 마쳐야 하는 계약조건을 따라도 이미 6개월가량 늦어졌다.
올 초 발생한 부품결함 문제는 지난 4월에 해결했지만 이번에는 공급사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안정성 테스트, 검수 등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본사의 인수합병(M&A)으로 한국오라클과 통합을 준비 중인 한국썬의 해당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이 오라클 본사로 넘어가면서 혼선이 빚었기 때문이다. 글로벌기업답지 않게 계약조건과 달리 안정성 테스트를 간소화하자고 요청하는가 하면 KISTI가 이 제안을 거절한 이후에도 뚜렷한 이유 없이 안정성 테스트에 응하지 않는다.
오라클 본사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썬의 KISTI 슈퍼컴 사업이 수익성 측면에서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다.
한국썬은 2007년 사업자 선정 당시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인데다 이후 사업부진으로 인해 총 300억여원 규모인 4호기 1, 2차시스템 사업에서 100억원 가까이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지보수요율 계약조건(6%)도 오라클 본사 가이드라인의 절반에 불과하다. 최고 20억원으로 규정한 사업 지연 위약금까지 물어야 할 판이다.
내부 사정이 있다고 해도 중소기업도 아닌 글로벌 IT기업이 약속한 사업일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서비스가 지연한 사이 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은 새로운 시스템의 10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4호기 1차 시스템만 이용한다. 시스템 자원을 학계와 산업계에 개방,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을 높인다는 국가 슈퍼컴사업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 사업을 주관하는 KISTI 역시 사업관리 소홀에 따른 관리 책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좀처럼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자 KISTI는 이달 초 오라클 본사에 그간의 사업지연 경과와 예상 피해를 담은 보고서를 보냈다. 사실상 최후통첩인 셈이다. KISTI 관계자는 “현재로선 서비스 개시 일정이 불투명하다”며 “하루빨리 서비스를 시작하기 위해 오라클 본사와 계속 협의하겠다”고 설명했다.
한국썬 관계자는 “내부 방침에 따라 해당 사업 상황을 외부에 밝힐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국가 슈퍼컴 사업은 대학·연구기관·중소기업 등 슈퍼컴을 독자 운영하기 힘든 기관을 위해 정부 예산으로 대형 슈퍼컴을 구축해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문제가 된 것은 슈퍼컴 4호기 사업의 핵심인 초병렬컴퓨팅(MPP) 2차 시스템이다. 국내 최고며, 세계에서 15번째로 빠른 슈퍼컴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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