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16일 오전 05시 30분. 미국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에서 남쪽으로 193㎞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지점. 이제껏 보지 못했던 폭발과 함께 미국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원자폭탄은 중성자가 우라늄-235(235U)·플루토늄-239(239Pu)와 같은 동위원소의 원자핵을 때릴 때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엄청난 열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원자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맨해튼계획’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39년 8월 2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아인슈타인의 권유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나치 독일에 지독한 수모를 겪은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동료 학자의 집요한 설득에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는 설득당하고 말았다.
맨해튼계획에는 나치에 쫓겨온 유럽과학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독일 출신의 제임스 프랑크와 한스 베테, 이탈리아 출신의 페르미와 세그레 등 대부분이 노벨상 수상자였다. 죽음의 폭탄을 제조하기 위한 맨해튼계획이 아이러니하게도 ‘노벨상의 등용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유다.
1945년 5월 맨해튼계획을 총괄한 오펜하이머 등 4명의 과학자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배타적인 것은 서로 보완적’이라며 원자폭탄은 죽음의 무기지만 역으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했지만 일본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실험에 참가했던 일부 학자들은 그 파괴력을 보고 일본에 핵폭탄을 투여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운명의 날이 결정되고,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 불리던 B29 폭격기는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4.5t의 폭탄은 반경 3km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4만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3일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7만명을 죽였다. 일본은 그달 15일 무조건 항복했고, 이로써 2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맨해튼계획은 막을 내렸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펼친 과학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다. ‘원폭 평화설’을 주장했던 오펜하이머는 그 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