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정보기술(IT) 분야는 사상 최대 수출 규모와 무역 수지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하는 데 전 세계 1·2위 업체가 포진한 디스플레이 산업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는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며 명실상부한 디스플레이 업계의 승자가 됐다고 자부할만하다.
하지만 이런 가시적인 성과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디스플레이 패널 업계의 성공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장비·소재 산업의 경쟁력이 디스플레이 패널의 경쟁력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국내에서 수출한 장비는 76억달러, 수입한 장비는 134억달러로 58억달러의 적자를 냈다. 소재는 무역 적자폭이 더 컸다. 195억달러의 적자를 냈다. 중국과 대만의 공세가 만만치 않다는 점도 우리 디스플레이 산업의 입지를 쉽게 자신할 수 없는 이유다. 대만의 AUO·CMO는 이미 올해부터 LCD 패널 라인을 8세대로 전환하고, 중국 BOE·TCL·IVO도 내년부터 가동할 8세대 라인 투자에 들어갔다. 양안의 LCD 생산이 본격화하는 2013년께에는 LCD 시장에 공급 과잉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뱅크는 2013년 LCD 패널 초과 공급률이 24.5%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을 넓히는 관건은 적기 투자와 생산이다. 공급 과잉이 일어나는 시점 전까지 국내 업체들이 시장 지배력을 확실히 가져야 경쟁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도 세계 1위 자리를 수성하기 위해 다시 한번 팔을 걷어 붙였다. 정부는 그동안 G7프로젝트(1995~2001년), 차세대 성장동력(2005~2009년) 등 대형 민관 프로젝트에 디스플레이 분야를 포함시켜 산업육성을 지원해왔다. 지난 5월 지식경제부는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민관이 공동으로 약 21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및 관련 장비 부품·소재 산업 육성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여기에 약 5000억원을 투자해 장비 국산화를 통해 제조 경쟁력을 높이고, 부품·소재를 개발해 제품 원가를 낮춘다는 방안이다. 또 총 1조2000억원을 투자해 올해 8월부터 시행될 월드프리미엄소재(WPM) 육성 정책 품목에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용 플라스틱 기판 소재를 포함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디스플레이 업계의 개발 능력을 높이기 위해 학계와 연계해 디스플레이 분야 인력을 키우는 정책도 추진한다. 최근 정부 정책의 목표는 디스플레이 소자 분야에서는 세계 1위의 경쟁력을 확보한 만큼 장비·소재 분야의 기술력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비 국산화율을 70% 이상으로 높이고, 해외의존도가 높은 광학 필름, 액정 배향막 재료 등을 집중 개발해 고부가가치 차세대 디스플레이 산업을 육성해 시장 주도권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최근 운영에 들어간 ‘차세대 LCD장비 개발 협의회’도 주목해볼 만하다. 수요 업체인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앞으로 2~3년 내에 11세대 LCD, 8세대 OLED, 플렉시블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제조라인에 신규 투자를 집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 전에 핵심 장비를 개발해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이번 협의회에서는 LG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의 팀장급 공정 전문가가 참여해 수요 기업의 입장을 제시하고 이를 충분히 반영해 개발이 곧바로 구매로 이어지도록 할 계획이다. 협의회 아래로 노광기, 식각장비(Etcher), 증착장비(CVD), 스퍼터, 습식장비, 코터, 로봇, VALC, 전극, 검사 및 수리, 임프린트, 파인메탈마스크(FMM), 증발기(evaporator), 플렉시블 공정장비 연구회를 뒀다. 연구대상 품목은 현재 14개에서 앞으로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친환경 공정 기술을 개발해 온실 가스 배출을 억제하는 사업도 주관 업체를 선정하고 지난달 시행에 들어갔다. LCD 식각(에칭) 공정에서는 지구온난화지수(GWP)가 높은 6불화황(SF6)이 사용된다. 정부는 낮은 GWP를 적용한 드라이 에처와 GWP 1000 이하의 SF6 대체 화합물을 개발해 공정 녹색화를 실현한다는 계획이다. 1단계(3년)에서는 이미 개발된 저GWP 가스를 사용하는 에처 장비와 공정을 상용화하고, 2단계(2년)에서는 SF6 대체 화합물을 사용하는 공정 상용화 기술을 개발할 예정이다. 지금의 공정을 계속 유지할 경우에 오는 2015년 SF6 배출량은 2231만3000CO2톤이 되지만 새로운 물질로 대체하면 1561만9000CO2톤의 이산화탄소를 감축할 수 있다. 장비업체 IPS가 친환경 공정 개발 주관 사업자로 선정됐고, 소디프신소재·울산화학·대성가스가 대체 가스를 개발한다.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가 70%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핵심 장비는 대부분 수입하고 있는 능동형(AM)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분야는 5.5세대 기술 개발이 끝나는 대로 6·7세대를 뛰어넘은 8세대급 기술 개발에 착수한다. 5.5세대 기술 개발 때와 마찬가지로 대기업 중심으로 컨소시엄을 짜서 운영할 방침이다. OLED 조명 사업화 기술 개발 사업도 동시에 추진한다. OLED 개발 과제 투자금은 민관 합쳐 올해 160억원가량이다. 강미숙 지식경제부 반도체디스플레이과 사무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OLED 분야 개발 사업에 내년에도 비슷한 예산이 투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경부와 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디스플레이 업계 인력 수급 현황에 대한 실태 조사를 추진해 이번 달 초 분석을 마쳤다. 오는 8월부터 수요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할 계획이다.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세제 지원도 검토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AM OLED 소재 분야만 R&D 세액 공제 혜택을 받고 있지만 LCD 등 디스플레이 패널 전 분야로 확대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 또 대만·중국 등 경쟁국보다 관세제도가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관세율을 현행보다 8% 정도 낮추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정부의 계획을 종합하면 민간 중심의 차세대·대면적 디스플레이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디스플레이 업종에 종사하는 산학연이 연계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치열하게 1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장비·소재 업체들이 협력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디스플레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핵심 관건이다. 구자풍 디스플레이산업협회 고문(전 사무국장)은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 1등 성공 신화는 뚝심 있고 진취적인 기업인들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정부 관계자들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며 “민·관·학이 힘을 합쳐 산업을 일군 대표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