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현 장관 ‘미래를 향한 IT신천지 개척에 헌신한 과학자 출신’
경상현 초대 정통부 장관-과학자에서 장관까지
경상현 초대 정보통신부장관. 그는 ‘ IT강국 한국’ 건설에 헌신한 사람이다.
경 장관의 한국 IT인생은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기술도입이 시발점이다.
그는 9년여 미국 벨연구소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를 거쳐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한국전산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어 체신부차관을 지낸 후 문민정부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서울대 공대(화학과) 2년을 수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 로드아일랜드 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 MIT공대에서 공학(원자력)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알곤 국립연구소에서 1년여 근무하다가 벨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통신망 계획연구를 맡았다. 1975년 정부 과학기술자 유치계획의 일환으로 귀국해 한국원자력연구소 에너지시스템연구실장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1975년 10월 하순 어느날.
과학기술처에서 경 박사에게 시스템발전방안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경 장관의 당시 회고.“시스템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회의였습니다. 회의는 과기처 정보산업국장인 김영욱 박사(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역임)가 주재했어요. 귀국 후 처음 참석하는 회의라 긴장하고 낯설었습니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간략히 자기소개를 했다.
그 자리에서 경제기획원 김재익 기획국장을 만났다. 김재익 국장은 미 스탠포드대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5공(共) 들어 청와대경제수석으로 발탁돼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아래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전 대통령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그는 1983년 10월 8일 전 대통령을 수행해 미얀마를 방문 중 아웅산 폭탄테러로 안타깝게 순직했다.
그날 회의는 퇴근시간을 넘겨 늦게 끝났다. 서둘러 회의장을 나서는데 김재익 국장이 뒤따라 나오면서 말을 걸었다. 경 장관의 기억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김 국장이 물었다.
“벨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통신망 계획연구를 했습니다.”
“연구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국에서는 아날로그 전자교환기가 나오는데 구식인 기계식 교환기를 계속 설치하는 것이 좋은지, 운영비와 장비구입비 등 수요측정에 대비해 경제성을 판단하는 내용입니다.
김 국장이 반색을 하며 “아, 그렇습니까. 시간 좀 내 주십시오”라며 경 박사의 소매자락을 잡았다. 두 사람은 경제기획원 김 국장 방으로 올라갔다. 그 날 남덕우 부총리(국무총리 역임)가 늦은 시간인데도 퇴근하지 않고 집무실에 있었다. 김 국장은 경 박사를 데리고 곧장 부총리실로 가서 인사를 시켰다.
남 부총리가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해 교환기를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한 쪽은 아날로그 전자교환기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기계식교환기를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경 박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경 박사는 미국의 예를 들어 대답했다.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은 기계식을 아날로그 전자교환기로 교체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남 부총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 국장을 보며 말했다.
“김 국장, 앞으로 경 박사와 많은 대화를 나눠 보세요. 경 박사.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자문도 좀 해주세요.”
두 사람은 경제기획원 근처 한식집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며 교환기에 관해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었다. 이 후 두 사람은 일주일에 1~2번씩 두 달 여를 계속 만났다. 두 사람은 아날로그전자교환기 도입이 전화적체를 해소할 수 있고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의 기반이 된다는데 생각이 같았다. 그의 계속된 당시 회고.
“당시 아날로그 전자교환기술을 곧바로 도입하느냐, 또는 디지털 전자교환 기술을 국내기술진이 개발할 때까지 기계식 교환기만 계속 사용하느냐를 놓고 찬반 공방이 치열했습니다.”
경 박사는 아날로그 전자교환 기술 도입의 타당성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김 국장에거 넘겨주었다. 그게 1976년 초였다.
이 방안은 1976년 2월 27일 열린 경제장관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했다. 정부는 경 박사의 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를 한국과학기술원(KIST)에 맡기고 그 책임자는 경상현 박사로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가 만든 방안이 한국 전자교환기 도입과 기술 개발 정책이 된 것이다.
경 박사는 이 일을 하기 위해 1976년 2월 KIST시스템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업무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교환기 도입에 따른 기술분석은 안병성 박사, 경제분석은 유성재 박사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경 장관의 당시 상황 증언.
“그해 3월부터 미국과 일본, 독일의 교환기 업체를 대상으로 입찰을 검토했습니다. 이어 타당성 검토를 위한 국제입찰이란 조건을 달아 4월 17일 안내서를 AT&T, ITT, GTE, NEC, 지멘스, 후지쯔 등 6개 업체에 보냈습니다.”
이 때 조건으로 응찰자는 제안한 내용에 책임을 지며 입찰 보증금을 예치해야 한다는 점과 교환기 가격과 부품생산설비 원가, 기술료, 지술지원료, 교육훈련비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도록 했다.
그해 6월 14일 마감결과 AT&T를 제외한 5개 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경 박사는 이들 업체의 응찰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이런 조건이라면 경제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반제품을 수입해 조립생산을 하다가 국산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도 냈다.
경 박사는 7월초 이런 검토 결과를 정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9월 이경식 체신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전자통신개발추진위원회(TDTF)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했다. 경 박사팀은 소속을 TDTF으로 옮겨 전자교환기 기술도입을 위한 부문별 실무작업을 담당했다.
그해 12월 박원근 체신부 장관(예비역 중장,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역임)이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국산화와 통신망 및 전자화, 그리고 디지털 전자교환기술 국내개발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다. 경 박사는 박 장관을 수행해 이 자리에 배석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는 1976년 12월 KIST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설립했다. 초대 소장으로 KIST 부소장인 정만영 박사가 취임했다. 연구소에 3명의 부소장이 있었는데 김종련, 안병성, 경상박 박사 등이었다.
경 박사는 도입 기종 선정의 총괄책임을 맡았다. 기술반은 안병성 박사. 경제반은 유성재 박사, 생산반은 박헌서 박사가 책임자였다. 김영무 김&장의 변호사가 계약전문가로 참여했다. 그 후 정도길 체신부 기술정책관이 운용분야 책임자로 합류했고, 이강우 경제기획원 투자3과장과 유영준 상공부 전자공업과장, 장석정 과학기술처 과학기술심의관이 해당 분야 정책을 지원했다.
경 박사는 우선 협상대상으로 ITT와 후지쯔 등 2개 업체를 선정해 재협상을 진행했다.
1977년 8월 현지조사와 협상 내용을 토대로 최종 협상결과를 정부에 보고했다.
정부는 경 박사팀의 보고를 토대로 그해 9월 최종 도입기종으로 ITT의 M10CN를 선정했다. 이런 결정에 대한 경 장관의 회고.
“후지쯔 기종이 기술이나 성능, 가격 등에서 ITT를 앞섰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핵심기술을 이전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기술을 이전받아 교환기를 국산화해야 할 한국의 선택은 자명했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977년 12월 체신부 산하 한국통신기술연구소로 독립했다. 경 박사는 이곳에서 연구소 부소장과 체신부장관 보좌관, 선임연구부장, 시분할개발사업단장 등으로 일하면서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도입과 개발, TDX국산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 5월 아날로그 전자교환기 제2기종 국제입찰과 기종선정 책임을 맡았다. 정부는 그해 12월 AT&T의 No.1A ESS를 2기종으로 선정했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출범하자 그는 기술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부사장으로 간 것은 전자교환기 도입과 KT의 통신망이 바뀌는 것에 따른 것이었다.
“김재익 청와대경제수석이 추천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3년 여 부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1984년 7월 친정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를 통합키로 한 정부 방침에 따라 두 기관의 소장을 겸직하면서 통합을 마무리했다. 1985년 3월 통합기관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가 출범하자 그는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8년 여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TDX, 4메가D램과 중형 컴퓨터 타이컴1,11, CDMA이동통신시스템개발 성공 등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IT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놓았다.
전두환 대통령과 4MD램 개발과 관련한 일화.
1988년 2월 8일 저녁. 퇴임을 보름 앞둔 전두환 대통령은 4MD램 개발 유공자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전 대통령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다.
“퇴임 전에 4MD램이 나와서 내가 직접 만든 것 보다 더 기쁩니다. 나중에 16MD램이 나오면 내 머리털을 팔아서라도 연구원들에게 한턱 내겠습니다.”
전 대통령의 구수한 입담에 만찬장은 한순간 박수갈채와 환호로 가득했다.
경 소장은 1992년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사회진흥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인 1993년 3월 체신부 차관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그리고 1994년 12월 IT중심으로 새롭게 재편하는 글로벌 경쟁체체 속에서 미래부서인 정보통신부 초대 장관으로 등장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