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부, `통신사업자는 늘리고, 규제는 풀고… 통신시장 대문 더 열어`
통신사업 경쟁확대
사진-1. 김영삼대통령이 1월9일 청와대에서 새해 첫 업무보고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 김영삼대통령이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둘 중 하나 사용)
정보통신부 출범으로 IT강국의 꽃은 차츰 피어나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이 구호처럼 정보화에 가속도를 낸 것도 이 무렵부터다.
조직의 변화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1994년 12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청사로 돌아온 경상현 정통부 장관은 취임식을 가진 후 두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하나는 현판식이었다. 관련 기관장과 단체장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보통신부`란 현판식을 청사 1층 입구에서 가졌다. 이어 회의실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경 장관은 기존 정보통신부 영문 명칭을 MOC에서 MIC(Ministry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로 변경했다.
늘 그랬듯이 새 출발에는 인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정부는 1994년 12월 25일 정보통신부 차관에 이계철 기획관리실장을 승진 발령했다. 27일에는 1급 인사를 단행했다. 경 장관 취임 후 첫 1급 인사였다. 정통부 기획관리실장에는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한국정보사회진흥원장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을 전보, 발령했다. 그리고 정보통신정책실장에는 정홍식 전산관리소장(정통부 차관, LG데이콤부회장 역임)을 승진, 발령했다. 박 실장은 체신부 통신정책국장과 전파관리국장, 정보통신정책실장 겸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기확단장 등 부내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IT강국 기반을 다지는데 앞장섰다. 정 실장은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산업정책의 기획 실무를 담당했다. 전산망위원회 사무국장을 거쳐 체신부 통신정책국장과 전산관리 소장을 지냈다.
인사와 관련한 경 장관의 회고.
“정홍식 실장은 승진 인사에도 불구하고 별로 내키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우정국장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10년간 산업정책을 다뤘고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을 지낸 바 있어 `당신이 안하면 누가 하느냐`고 설득해서 발령을 냈습니다.”
1995년 새해를 맞아 정보통신부는 IT 신천지 개척 열망으로 한 껏 들떠 있었다. 첫 관문은 대통령에 대한 새해 업무보고였다.
그해 1월 6일 오전 9시 청와대 춘추관. 김영삼 대통령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 대통령은 이날 자신에 찬 모습으로 세계화를 국정목표로 제시한 후 “정보화시대라는 새로운 조류가 지구를 하나로 만들면서 세상을 바꾸고 있다”면서 “이제 세계는 무한경쟁의 무대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기술 개발 없이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1995년도 새해 업무보고 형식을 대폭 간소화했다. 그간의 관행인 부처 개별보고를 받지 않고 대신 부처를 기능별로 나누어 합동업무 보고를 받았다. 청와대측은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각 부처는 핵심 과제 3~4건만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처 등 관련부처 국장급이상 간부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제부처에 대한 새해 첫 업무보고회의를 주재했다.
경 장관은 이날 “시외전화 부문은 새 사업자를 선정해 경젱체제를 도입하고 개인휴대통신(PCS)신규 사업자도 새로 허가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서울~대덕 간 초고속정보통신 선로 시험망을 구축하고 한국통신 정부주식 14%를 추가 매각하겠다”면서 “모뎀 등 IT기기 10종을 선정해 세계 일류 상품화 육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업무와 관련한 특별한 지시나 당부를 하지 않았다.
경 장관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대통령께서 정보통신부 업무에 대해 특별히 지시한 사항은 없었습니다. 대신 경제부처 공통사항으로 세계화를 위해 일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보통신부는 1월 11일 1995년도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했다. 정통부가 한 해 추진할 구체적인 정책구상을 국민에게 밝힌 것이다. 크게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과 △정보통신산업 육성△신규 정보매체활성화 △통신산업 경쟁력강화△해외진출 지원△통신이용 편익 증진 등이었다.
하지만 IT업계의 눈길은 통신산업 경쟁력 강화에 집중했다. 그 핵심은 신규사업자 허가였다. 먼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제2 시외전화사업자 및 PCS사업자를 올해 안에 신규허가하고 한국항만전화와 주파수공용통신(TRS)서비스를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신사업 경쟁체제를 더 확대하겠다는 정책변화의 시그널이었다.
경 장관의 말.
“시장개방 요구 등으로 국내 통신시장에 경쟁체제를 더 갖춰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체신부시절부터 그런 정책을 도입해 왔습니다. 통신시장에 복수사업자를 선정해 공정 경쟁을 하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어 경쟁력을 높여 나가는 것이 당시 통신정책의 과제였습니다.”
잠시 1994년 체신부 시절 통신사업 경쟁정책을 살펴보자.
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는 1994년 6월 30일. 체신부는 통신업계나 대기업들이 군침을 꿀꺽 삼길만한 `통신사업구조개편방안`을 발표했다. 개편방안의 골자는 △통신사업자 분류방식 개편 △기간통신사업자의 지분구조 △시외전화사업 경쟁도입 △개인휴대통신 등 신규서비스 도입 △자가통신 설비를 이용한 통신서비스 제공허용 △통신사업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이다. 이른바 제2차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이다. 기본 원칙은 `선(先) 국내경쟁 후(後) 국제경쟁`이었다.
체신부는 이 개편안을 만들기 위해 4개월 전인 1994년 2월 통신사업구조개편 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추진협의회는 △통신사업자별 영역재조정 △규제완화 △기본통신사업의 경쟁력 강화 △신규 통신서비스 사업의 정책 방향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 조정하는 일을 담당했다.
추진협의회 위원장은 김세원 서울대 교수(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역임, 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가 맡았고 각계 인사 14명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위원은 강광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박한규 연세대 전파공학과교수, 엄영석 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유재현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 방석현 통신개발연구원장, 배병휴 매일경제 논설주간, 변도은 한국경제 논설실장, 김주용 한국전파진흥회장, 박성규 한국통신산업협회장, 김상국 한국통신 부사장, 곽치영 데이콤 부사장, 성태경 이동통신 전무, 김종길 무선호출사업자협의회장,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실장 등이었다.
체신부는 그해 7월 전기통신기본법 및 전기통신사업법 등 관련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체신부는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쳐 9월 정기국회에 제출키로 했으나 부처 간 이견이 커 진통을 겪었다. 기본법 개정은 규제완화로 통신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었다.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분류체계 개편과 소유구조 조정 및 진입조건 완화 등이 골자였다. 구체적으로 통신사업자(유선전화사업)와 특정통신사업(무선전화사업)의 구분을 없앴다. 우선 통신사업자들이 유무선에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벽을 허물었다. 또 전화와 이동통신 등 기간통신사업에 대해 최대 주주의 지분소유 구조를 조정했다. 통신사업자 지분참여 한도를 대주주의 경우 일반 10%, 특정 3분의 1인 것을 모두 3분의 1로 통일(유선사업자는 10%)했다. 교환기기 등 전기통신설비를 제조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통신서비스 참여를 엄격히 제한했다. 설비업체는 일반 3%, 특정 10%에서 10%(유선전화는 3%)로 묶었다.
체신부의 이런 개정안에 대해 상공자원부와 재계는 반대하고 나섰다. 상공부의 입장은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해 통신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통신서비스업 참여에 대한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체신부 입장은 강경했다. 체신부는 `기간 통신사업은 공공성과 공익성이 우선돼야 하기 때문에 특정인이 과도한 지분을 소유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체신부와 상공자원부가 갈등 양상을 빚자 그해 9월 8일 저녁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두 부처 차관과 간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 회동을 가졌다. 해법을 ?기 위해서였다. 체신부에서 경상현 차관(정통부 장관 역임)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 이인표 통신정책국장(SKT 감사 역임) 등이 나갔다. 상공자원부에서는 박운서 차관(데이콤 회장, 파워콤 회장 역임)과 정해주 차관보(산업자원부장관 역임, 현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장), 김세종 전자정보공업국장(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장 역임) 등이 참석했다. 이 회동은 결론 없이 끝났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이인표 통신정책국장의 회고.
“서로 입장 차이만 확인한 자리였어요. 그 자리에서 결론이 날 수 없었습니다.”
두 부처가 양보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개정안은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뚝심으로 매듭을 지었다. 경제장관회의가 열린 9월 하순 어느 날. 회의가 끝난 후 정재석 부총리실에 윤 장관과 김철수 상공부 장관 등이 따로 모였다. 부처 간 이견을 해소하기 위한 `최종 담판` 성격의 부총리 주재의 회의였다. 윤 장관의 기억.
“경제 장관 회의가 끝나고 정재석 경제 부총리 주재로 이 문제와 관련해 별도 회의를 했습니다. 저와 김철수 상공부장관 등이 참석했습니다. 정 부총리가 저 보고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방법이 있다`고 했더니 `그게 뭡니까`라고 했습니다.”
윤 장관의 계속된 설명.
정 부총리가 상체를 바로 세우며 윤 장관을 주시했다.
“체신부 장관을 바꾸면 됩니다. 다른 장관이 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됩니다.”
정 부총리가 그 말을 듣더니 김 상공 장관을 쳐다보며 물었다.
“김 장관, 윤 장관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김 상공 장관이 난감한 표정으로 `허허`하며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정 부총리가 최종 결론을 냈다.
“그럼 방법이 없네요. 이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체신부 개정안은 국회에서 또 한 차례 논란이 됐다. 체신고 출신으로 당시 민자당 간사였던 조영장 의원조차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하려면 지분한도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회체신과학기술위원회(위원장 장경우)는 그해 12월 13일 체신부안을 본회의에 넘겼다.
국회는 12월 17일 본회의를 열어 다른 법률과 같이 전기통신법기본법과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통신시장은 이런 과정을 거쳐 1995년부터 경쟁 확대라는 새로운 소용돌이 국면에 접어 들기 시작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