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의 범인 모습은 당시 해당 지역 일대 폐쇄회로TV(CCTV)에 수차례 포착됐다. 그는 피해 아동이 진술한 대로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 흰색 운동화를 착용한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 범인 몽타주를 그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얼굴 이목구비가 전혀 또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범행 현장 인근 마트에 설치된 사설 CCTV에 비교적 선명한 모습의 피의자 얼굴이 찍혀 수사는 뒤늦게나마 활기를 띨 수 있었다.
동대문구에 설치된 방범용 CCTV 150여 대는 대부분 중저가 아날로그 CCTV다. 이 카메라 렌즈가 잡아낸 화질은 40만화소 정도. 말 그대로 사람 형태만 잡아낼 뿐 얼굴을 제대로 식별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현재 국내에 설치된 CCTV는 대략 250만여 대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95%가 40만화소 미만의 아날로그 카메라다. 특히 각 지방자치단체가 거리에 설치한 방범용 CCTV는 거의 다 아날로그 카메라라고 보면 된다. 지자체가 디지털 CCTV 카메라를 설치할 만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력 범죄가 발생해도 수사기관은 범인을 쫓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국내 CCTV 카메라 업계는 크게 렌즈와 카메라, 영상분석장치(DVR) 제조 등 3가지 분야로 나늬어 있다. 삼양옵틱스 등의 업체가 카메라용 렌즈를 생산하면 이를 바탕으로 삼성테크윈, 씨앤비텍, 엑시스 등의 업체가 아날로그ㆍ디지털 CCTV 카메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도로나 각 시설물에 설치한 CCTV 카메라로 영상을 정밀 분석하는 DVR 제조는 아이디스 같은 업체가 맡고 있다.
화면의 질을 나타내는 화소는 가장 먼저 렌즈에서 판가름 난다. 40만화소급 렌즈는 주로 아날로그 CCTV 카메라에 들어가지만 최근에는 1메가픽셀(100만화소) 이상급 렌즈도 속속 개발돼 디지털 카메라에 투입되고 있다.
이들 렌즈로 제조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카메라의 화질은 확연히 다르다. 씨앤비텍이 최근 출시한 디지털 CCTV 카메라는 풀HD급으로서 2메가픽셀 화면을 선보인다. 이 회사 관계자는 신제품에 대해 "스캔 방식의 이미지 센서를 활용함으로써 초당 30프레임에 가까운 선명한 동영상을 재생한다"며 "촬영 이미지를 확대하면 사람 얼굴 흉터까지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품 기능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CCTV 화면 통제실에서 경고 메시지를 내보낼 수 있는 `말하는 CCTV`나 360도를 넘어 540도까지 회전하는 카메라가 개발됐고 적외선 투광기를 바탕으로 야간에도 선명한 화질을 확보할 수 있는 제품도 나왔다.
문제는 일반 아날로그 CCTV 카메라와 고화질 디지털 카메라 간 가격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점이다. 디지털 CCTV 카메라에 투입되는 1.3메가픽셀짜리 렌즈는 40만화소급보다 4~5배가량 비싼 실정이다. 삼양옵틱스 관계자는 "CCTV 화질이 화소에 따라 결정되지만 이 화소에는 렌즈뿐 아니라 카메라 기종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일단 렌즈에서 수준별 가격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카메라 완제품 사이에도 (그러한 차이가) 그대로 이어진다"고 전했다.
실제로 렌즈 납품 후 아날로그ㆍ디지털 카메라 완제품 간 가격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CCTV 카메라와 영상분석장치를 생산하는 윈포넷 관계자는 "일반 아날로그 CCTV 카메라보다 1메가픽셀 이상급 디지털 카메라는 6~7배 이상 비싸다"고 밝혔다.
국내 CCTV 카메라 업계는 높은 기술 수준으로 화질이 뛰어난 제품을 생산해도 외국 시장에 비해 국내 수요가 턱없이 모자라 공급에 애를 먹고 있다. 가장 큰 수요처인 지자체가 늘 예산 문제에 발목이 잡혀 디지털 CCTV 카메라 보급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윈포넷 관계자는 "보안이 중요한 정부 기관이나 은행 등 일부에만 보급될 정도로 국내 디지털 CCTV 카메라 시장은 이제 막 초기단계에 진입한 상태"라며 "고화질 CCTV 카메라의 수출과 내수 비중도 지금은 7대3 정도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DVR업체인 아이디스 관계자도 "국내에도 시장 확대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현재로서는 지자체가 강력 범죄 증가 추세에 발맞춰 디지털 CCTV 카메라 보급을 늘림으로써 시장 가격이 단계적으로 떨어지길 바랄 수밖에 없다. 한 CCTV 업계 관계자는 "무작정 CCTV 설치 대수를 늘린다고 효용이 커지진 않는다"며 "기술 수준이 더 높은 제품 보급을 확대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매일경제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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