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수 회장 "전자업종, 영원한 1등은 없다"

안경수 회장 "전자업종, 영원한 1등은 없다"

안경수 노루페인트 회장



우리나라와 일본은 한마디로 `애증`의 관계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수식어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심적으로 멀리하고 싶지만 사회 ·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특히 국내 대표 산업으로 부상한 `전자` 분야에서 우리와 일본 관계는 `한 지붕 두 가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닮은꼴이다.

전자산업 초기에 일본을 벤치마킹해 성장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려워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맏형` 격인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적인 경기 불황기에 일본 대표 기업인 히타치 · 소니 · 파나소닉 등 `전자 골리앗`을 추월해 매출 · 이익 면에서 세계 넘버원으로 성장했다. LG전자도 불황기에 공격 경영의 고삐를 죄면서 TV · 휴대폰 등 간판 제품에서 점유율을 크게 올려 산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과연 전자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일본을 제치고 글로벌 수위에 올랐을까. 세계 전자산업을 호령하던 일본이 맥없이 이대로 주저앉을까. 지금까지 우리 기업의 확고부동한 경영 모토였던 `스피드 경영`과 `캐치 업` 전략이 넘버원 입장에서도 유효할까. 일본과 우리 전자 기업은 세계 무대에서 `영원한 맞수`로 남을까.

15일 광복절 65주년을 맞아 후지쯔와 소니 본사 중역을 지낸 안경수 노루페인트 회장(58)을 만나봤다. 안 회장은 지난달 노루페인트를 맡기 직전까지 소니 본사 임원으로 근무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후지쯔와 소니그룹 임원으로 세계 시장을 누볐다. 공교롭게 후지쯔 합류하기 전에는 대우전자 · 삼성전자 중역을 지낸, 한국과 일본 `국가 대표급` 전자 기업을 두루 경험한 전문 경영인이다.



#“전자`업`의 개념이 바뀌었다.”

안경수 노루페인트 회장은 “국내 전자업계가 사상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너무 이르다”며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가장 중요한 시기로 오히려 자만하지 말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만의 진짜 경쟁력 즉 `오리지널리티`를 찾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 잘하는 품목은 전자업종 중에서도 부침이 아주 심합니다. 지금 돈을 버는 게 메모리와 LCD 정도입니다. 메모리는 과거 인텔이 1등이었습니다. 이어 일본이 주도했습니다. 그 다음 바통을 이어 받은 게 한국입니다. 디스플레이도 우리가 원래 1등이 아니라 샤프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물론 국내 기업이 잘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외부 환경을 잘 이용한 점이 컸습니다. 그만큼 전자 업종은 언제 1등 자리가 바뀔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제품 주기가 빠른 `졸면 죽는` 사업입니다. 휴대폰과 TV도 지금은 잘하고 있지만 한순간에 마이너 기업으로 쫓겨날 수 있습니다. 전자업계에 영원한 1등은 없습니다.”

안 회장은 특히 지금의 `나 홀로 호황`을 냉정히 볼 필요가 있다며 경계론을 폈다. “단순한 위기론이 아닙니다.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 기업보다 진짜 강해졌는지 곰곰이 곱씹어 봐야 합니다. 혹시 `착시 현상`은 아닌지 따져 봐야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원화 가치는 달러당 900원에서 1200원으로 떨어졌습니다. 일본 엔화는 어떻습니다. 엔화 가치는 30% 가까이 올랐습니다. 지금 실적이 좋다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본격적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안 회장은 우리 기업은 점유율과 실적을 보기 전에 산업과 시장을 먼저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자를 포함한 정보기술(IT)위상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과거 IT는 모든 업종을 이끄는 하이테크 분야이자 독특한 기술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의 일부입니다. 모든 업종에 IT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앞선 기술이 아니라 각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저변에 깔리는 인프라 기술로 새롭게 위상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전자 `업`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업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융합`이라고 강조했다.

“IT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분야와 결합할 때 비로소 진짜 경쟁력이 살아납니다. IT가 다른 분야, 다른 산업과 맞물려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따져 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품이 아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특히 서비스 모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IT와 전자업의 본질은 제조이자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와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융합과 신결합의 시대다.”

안 회장은 “서비스는 결국 고객에 가치를 주는 게 목적이며 최고의 제품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팔린다는 발상(프로덕트 퍼스트 마인드)`은 구시대적 사고”라고 말했다. “기상청을 예로 들어 봅시다. 과거 기상청을 규정하는 잣대는 슈퍼컴 능력이었습니다. 얼마나 막강한 슈퍼컴을 갖느냐가 바로 기상청의 경쟁력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기상청 진짜 경쟁력은 일기 예보를 보다 정확하게 맞추는 겁니다. 슈퍼컴은 단지 수단이자 도구일 뿐입니다. 고객이 기상청에 원하는 가치는 슈퍼컴 몇 대를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정확한 일기 예보를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안 회장은 “앞으로 전자 · IT 업종도 고객에 주는 가치에 따라 새로운 경쟁 구도가 만들어 질 수밖에 없다”며 “과거 전자 산업에 흔했던 부품-구성품-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수직 구조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융합은 결국 `신결합`을 말합니다. 새로운 결합 시대는 에코 시스템이 기본입니다.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산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품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들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생태계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안 회장은 특히 우리 기업은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과거에는 앞서 가는 기업 덕분에 이를 따라 하면 되었지만 사실상 1등에 올라선 지금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과거와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가 일본을 제친 데는 크게 4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속도(스피드 경영)입니다. 남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여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두 번째는 과감한 투자입니다. 선택과 집중의 관점에서 성공할 만한 사업에 과감하게 베팅했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글로벌 기업과 달리 강력한 오너 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세 번째는 실천력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남들이 토론할 때 우리는 이미 현장으로 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마지막으로 희생 정신입니다. 일년 열두달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뛰는 임직원이 큰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공존공영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여기에 일본,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중국 · 대만 등 주변 국가 기업의 강점을 십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일본은 저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기본과 기초 기술이 아주 강합니다. 소재와 부품 분야에서 아직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내수 시장도 우리보다 몇 배 큽니다. 자국 시장이 큰 만큼 우리보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계 시장에 내놓기 전에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칩니다. 한마디로 우리와 전면전을 펼칠 진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안 회장은 “우리 전자 기업이 과거 일본과 몇 차례 승리했지만 앞으로도 가능할지는 미지수”라며 “자만하지 말고 착실히 준비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 · 대만 기업을 어떻게 활용하고 협력할 것인지, 일본 원천 기술을 공유하며 더 고도화된 기술을 개발하고 부품 산업을 첨단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마디로 우리 기업이 지금 필요한 것은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리더십이라고 당부했다. “경제적으로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 자만에 빠지면 다른 나라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는 자멸하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과 대만 반도체 업체가 공동 연구를 하는 세상입니다. 중국과 미국 기업이 스스럼없이 손잡고 있습니다.”

안 회장은 “지금까지 우리 기업은 압축 성장을 위해 안팎의 환경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여기저기서 적을 만든 측면이 있다”며 ”앞으로 전개되는 공존공영 시대에는 유아독존보다는 더불어 같이 사는 기업이 결국 진짜 승자가 될 것“이라고 힘 줘 말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